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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벨라 Aug 28. 2020

피해자를 변호하다.

#2. 가해자보다 더 상처가 되는 비가해 가족_ 엄마는 누구 편이야?

그날 밤, 결국 나는 슬리퍼를 신고 집을 뛰쳐나왔다. 7년을 아빠라고 불러야 했던 그 남자. 더 이상은 버틸 수 없다는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무작정 나의 친아빠에게 전화를 걸었다. "아빠 지금 어디야? 집에 있어? 집은 아직 거기야? 나 지금 가도 돼?", 나의 진짜 아빠는 무슨 일이 있냐고 하며 당장 집으로 오라고 해 주었다. 나는 그렇게 아빠의 반지하 집으로 다시 들어갔다. 옷가지 하나 챙기지 못하고, 한 겨울에 맨발에 슬리퍼를 신고. 얼마나 울었는지 엉망으로 부은 눈을 하고 아빠에게 돌아갔다. 아빠는 계속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나는 대답할 수 없었고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 밤, 며칠 낮을 먹지도 않고 울기만 했다. 무능하지만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은 아빠였다. 아빠는 참지 못하고 이혼한 지 10년이 넘은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엄마는 내가 슬리퍼 차림으로 집을 나간 지 며칠이 지난 뒤에도 나를 찾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아빠와 엄마는 다투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빠는 이내 엄청난 일이 나에게 생겼다는 것을 알아채고 만 것 같았다. "미소야, 앞으로 아빠랑 여기에서 살자. 그런데 짐을 가져와야지. 엄마에게 가서 짐을 챙겨 오자." 아빠는 내게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결심한 것 같았다. 나는 내가 짐을 찾으러 그 집에 아니 그 집 근처에 한 발자국도 더는 갈 수 없다는 사실을 설명해야 했다. 그러자면 지난 5년 동안의 폭력을 말해야 했다. 아니, 차라리 여기서 삶을 끝내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응급실에서 깨어났을 때, 나는 또 맨발이었다. 인턴으로 보이는 의사는 나에게 자꾸 시꺼먼 물을 주면서 이것을 먹지 않으면 더 괴로운 처치를 해야 한다고 협박하듯 말했고, 아빠는 내 옆에서 세상에서 제일 초라하고 간절한 모습으로 나에게 그 검은 물을 마시게 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내가 견뎌내야 했던 그 더러운 시간들을 토해내야 한다는 마음으로 의사가 건네준 검은 물을 마셨다. 아침이 오는 것이 두려웠던 시간, 잠겨두었던 내 방문을 기어이 열고 들어왔던 그 사람의 소름 끼치는 발걸음 소리 그때마다 나를 짓누르던 불면의 밤들. 그 모든 것들을 나는 몇십 개의 알약으로 끝낼 수 있다고 자만했었다. 이제, 나는 나를 파괴하는 대신, 그의 폭력을 벌하고 싶어 졌다. 아니, 이렇게 응급실에서 깨어난 이상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 더 이상 함구하기가 어려웠다. 대충의 처치가 끝나고 입원을 하지 않는 대신 병원에서는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서류 따위에 서명을 한 후 간신히 응급실을 벗어났다. 집에 돌아오는 길, 아빠는 내게 콩나물 해장국을 먹자고 했다. 한 그릇에 5천 원,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콩나물해장국, 울면서 한 숟가락을 겨우 입에 넣었을 때 아빠에게 말했다. "나 아무래도 경찰서에 가야 할 것 같아."  


사실, 나는 정말 대학에 가고 싶었다. 아빠처럼 살고 싶지 않았다. 아빠는 10여 년 전 노다가를 하다가 다리를 다쳤고, 그 후로 엄마와 다투는 횟수가 늘어났다. 아빠가 다쳐 생계가 막막해지자 엄마는 일을 하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얼마 후 엄마의 화장이 진해졌던 것 같고, 엄마는 집을 나갔다. 어렸던 나는, 엄마가 다른 사람과 산다는 것을 안 다음 아빠 옆에 있어 주기로 했던 것 같다. 그렇지만 다리가 온전치 못한 아빠가 나를 혼자 키운다는 것은 어려웠을 테고 그렇게 나는 엄마와 그 남자가 사는 집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렇게 엄마와 새아빠라는 사람과 함께 산 지 3년쯤 지났을까. 내가 중학교 2학년이었던 그 해 여름부터 였다. 자주 다리가 아팠던 나에게 다리를 주물러준다는 것이 시초였다. 처음에는 정말 내 아픈 다리를 걱정해주는 줄만 알았다. 그리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의 신체에 그의 손이 침범하는 곳은 다리 만이 아니었다. 나는 늘 방문을 잠그는 습관이 들었고 그는 기어코 잠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엄마와 다투고 나서 '네가 엄마와 나의 다리 역할을 해 주어야 해. 나와 엄마가 헤어지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 다시 못살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 너의 역할이 정말 중요해. 나는 요즘 너의 엄마 때문에 너무 힘들다'라고 하며 그는 나의 삶을 잠식해왔다. '대학에 가자. 대학에 가는 날까지만 참자. 그 인간은 등록금을 줄 거고 나는 친아빠와는 다른 삶을 살 거고, 그때가 되면 나는 벗어날 수 있을 거니까 그때까지만 참자.' 고3이었던 나는 그렇게 자신을 속여가며 시간과 분투하고 있었다. 


의례적인 담임 선생님과의 상담시간이었다. 그 전날도 그 사람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었고 나는 밤새 한 숨도 자지 못하고 학교에 갔었다. 잠을 못 자 몽롱한 상태여서 였을까? 나는 평소의 나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법한 질문을 선생님에게 했다. "선생님, 돈이 없으면 대학에 갈 수 없겠죠?" 선생님은 내가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의외라는 듯 웃으며 말했다. "아니야, 학자금 대출이라는 것도 있고, 대학에 합격하면 과외도 할 수 있고 아르바이트 도 할 수 있는 성인이 되니까 돈이 당장 없어도 대학에 갈 수 있는 방법은 있어." 그 한마디였다. 나는 그제야 그 지긋지긋한 폭력의 방에서 벗어날 명분과 용기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바로 그다음 날, 그가 내 방을 다시 찾아왔을 때 나는 처음으로 그에게 소리를 질렀고, 맨발의 슬리퍼 차림으로 집이었지만 한 번도 집인 적 없었던 그 지옥 같은 곳의 문지방을 넘어, 나의 아빠에게, 또 나 자신에게로 뛰쳐나올 수 있었다. 


경찰에서의 진술은 크게 어렵지 않았다. 나는 차분하게 내 기억이 보존된 한도 내에서 그의 지속적인 성폭력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진술할 수 있었고, 말하는 동안 몇 번 울컥하기도 했지만 비교적 차분하게 내가 입은 피해에 대해서 말했다. 경찰에 신고를 하고 며칠이 지나서야, 엄마에게서 전화가 왔다. 내가 집을 나간 지가 언젠데, 몇 주가 지났는데, 그제야 내게 전화를 한 엄마의 목적을 잘 알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받기가 두려웠다. 엄마가 내 엄마가, 나를 아홉 달을 품어 배 아파 나를 낳고, 젖을 먹여 길러준 내 엄마가, 곱게 머리를 빗어주며 세상에서 내가 제일 이쁘다고 해 주었던 엄마가. 그 사람을 고소하고 나서야 나를 찾았다는 것과 나를 찾은 이유가 나를 위해서가 아닐 것이라는 내 예감이 맞을까 봐 무서워서 전화를 받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예감은 전혀 틀리지 않았다. 


나는 이제, 경찰에 신고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수년 동안 나의 집이었지만 한 번도 내 집이었던 적 없는 곳에 내가 봐야 할 교과서가 있었고, 나의 물건들이 있었고 내가 아끼는 옷들이 있었고 또 망가진 내 자아가 있었다. 나는 그것들을 되찾아오고 싶었다. 그러나 소위 사법의 테두리 안에서 내가 찾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재판이 시작되었다. 경찰에 고소를 한 뒤 피해자 변호사라는 사람이 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기본적으로 사람을 믿지 않는 상태였고, 나 아닌 누군가가 나의 피해에 대해서 알게 된 다는 것이 싫었다. 피해자 변호사는 앞으로의 절차에서 나를 도와주겠다면서 면담을 제안했지만 나는 나의 지난 수년간의 폭력에 대해서 경찰에서 한번 말한 이후 그 시간이 되살아나는 공포를 겪고 있던 터라, 누구에게도 나의 사건에 대해 말하고 싶지 않았다. 피해자 변호사에게 나는 '면담을 하고 싶지 않다. 무슨 일이 있으면 아빠와 통화해달라'라고 건조하게 말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재판이 시작되자 이 사건에 대해서 오롯이 나의 편이 되어줄 수 있는 사람이 아빠 말고는 그 변호사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나는 이미 깊은 동굴에 들어간 이후였다. 


이제 피고인이 된 그 사람은 당연히 자신의 모든 혐의를 부인했다. 당연히 나는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피해자 변호사가 아빠를 통해 재판의 내용을 전달해주었다. 피고인은 자신은 나를 친딸처럼 생각했으며 모든 경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나에 대한 신체적 접촉은 내가 다리가 아프다고 하여 다리를 주물러 준 것이 전부라고 하면서 내가 친아빠의 사주를 받고 자신을 무고한 것으로 몰고 가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나의 엄마는 내게 계속 전화를 했다.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새아빠가 감옥에 가게 되면 엄마 인생은 망한다는 것이 주된 내용이었다. 왜 경찰에 신고를 해서 집안에 큰일을 만드냐고 나를 다그쳤다. 다시 가난해지는 것이 죽도록 싫다고 했다. 그렇게 된다면 모든 것은 내 책임이라고도 했다. 나에 대한 걱정은 단 한마디도 없었다. 엄마에게는 이미, 그러한 성폭력이 있었는지 여부 조차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피고인이 된 자신의 남편의 안위와 그에 따를 자신의 처지와 그가 처벌받을 경우 자신에게 닥칠 경제적 곤궁만이 엄마에겐 중요했다. 그래도 엄마인데,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을까. 나는 이제 더욱 살고 싶지 않아 졌다. 


엄마가, 내 엄마가, 내가 태어나 한 번도 사랑하지 않은 적이 없었던 내 엄마가,  나를 짓밟은 사람 편에 서서 나를 거짓말쟁이로 몰아가고 있었다. 피해자인 나에게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피고인이 친아빠처럼 나를 보살펴주었고 경제적으로도 충분히 베풀어주었는데, 내가 무리하게 여행을 보내달라고 했고 피고인이 그런 나를 아빠로서 타이르자 내가 화가 나서 집을 나갔고, 그 이후에는 이혼 후 재혼한 것에 앙심을 품고 있던 친아빠가 부추겨서 이 사건을 고소했다는 취지로, 피고인은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 리 없고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수차례 제출했다고 했다. 그리고 피고인을 위해서 증인을 자처했다고 했다. 친아빠는 그런 재판 진행 내용을 피해자 변호사에게 듣고 매우 화가 났고 맞춤법도 잘 알지 못하면서 수 통의 탄원서를 피해자 변호사를 통해서 제출했다. 그리고 나를 설득하려 했다. "네가 재판에 나가야 한대. 재판에 나가서 네가 경찰에서 했던 말이 사실이라고 판사님 앞에서 말해야 그 인간을 처벌할 수 있대. 미소야, 너무 억울하잖아. 네가 이제 와서 포기해 버리면 그 사람은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게 된단다. 제발 한 번만 판사님 앞에서 말해보자" 아빠는 내게 눈물로 호소했다. 피해자 변호사에게도 문자가 계속 왔다. 내가 출석하지 않으면 내가 경찰에서 진술했던 내용을 판사가 증거로 쓸 수 없게 되어 피고인이 처벌받지 않게 된다고 했다. 나는 그때는, 처벌 따위에 더 이상 관심이 없었다. 이미 나는 모든 것을 잃은 후였다. 엄마를 잃었으니까. 


피해자 변호사에게 메일이 왔다. 이런 사건을 많이 경험해봤다고 했다. 그런데 이렇게 새아빠나 심지어 친아빠에게  딸이 성폭력을 당한 경우 대부분의 비가해 보호자인 엄마가 피해자 편을 드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고 했다. 변호사의 말을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세상에 그런 엄마가 있다니. 그것도 여러 명이. 


엄마가 그 사람을 위해서 두 번째 탄원서를 제출했을 때, 나는 또다시 자살을 기도 했다 실패했고, 엄마가 그 사람을 위한 세 번째 탄원서를 제출했을 때 나는 재판에 나가기로 결심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엄마와 피고인은 이제 내 세계에 남은 하나뿐인 가족인 내 아빠를 능멸하고 있었다. 엄마의 세 번째 탄원서에는 아빠가 피고인에게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나를 이용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아빠가 엄마에게 갑자기 전화를 걸었다는 것을 증거로 내세우고 있었다. 정말이지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아빠는 내가 받은 상처와, 내 상처를 외면하고 도리어 피고인을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엄마의 악다구니와 그것으로 인해 상처 받은 내 모습에 충격을 받아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셨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피해자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고, 내가 이 사건을 고소 한 이후 엄마가 나를 회유하고 협박하기 위해 보냈던 문자를 전부 보내 법원에 제출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증인으로 출석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증인석에서 진실만을 말할 것을 선서하는 순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진실만을 말할 테니, 내 진실을 들어줄 수 있는지. 내 진실과 피고인의 거짓을 분별해 피고인에게 합당한 죄의 대가를 치르게 해 줄 수 있는지 판사에게 선서하게 하고 싶었다. 


증인신문과정에서 피고인의 변호인은 나를 사치스러운 고등학생으로, 성격장애가 있는 우울증 환자로, 나를 친딸처럼 여겨 친아빠처럼 은혜를 베풀어준 피고인에게서 돈을 뜯어내려 한 파렴치한으로 만들려 애썼다. 엄마 또한 그에 동조하고 협조했다. 피고인의 억울함을 풀어달라고, 선처해달라고 탄원하는 나의 엄마. 그런데도 나는 그 날 이후에도 엄마가 보고 싶었다. 그 사실이 죽을 만큼 싫었다. 엄마는 나를, 상처 입고 피투성이인 나를 그렇게 쉽게 돈 몇 푼에 버렸는데 난 엄마가 무슨 목적으로 내게 전화를 걸었는지 잘 알면서도 혹시나 나를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은 있지 않을까,라고 나 자신을 속이며 엄마 전화를 받고 싶었다. 그런 나 자신이 너무 나도 싫었다. 엄마는 나를 버렸는데, 나는 엄마를 버리지 못한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항소심까지 이어진 재판 과정 끝까지, 피고인은 무죄를 주장했으나, 판사님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결국 그 사람은 '친족관계'에 있던 나를 5년여간 지속적으로 추행한 죄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가 그 사람을 잃게 된 그 순간에, 나는 엄마라는 존재를 영원히 나에게서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피해자 변호사의 권유로 상담치료를 받았다. 내 피해에 대해 또다시 누군가에게 말해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지 못할 것 같았다. 다시 죽기로 결심한다면 이번에는 나의 아빠도 같이 죽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나는 살아남기로 결심했고,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기로 했다. 그러나 나는 내 사춘기에 아름다운 시간들을 지우는데 내 청춘의 시간을 허비해야 했고, 내 인생의 전부였던 엄마를 버리는 것에 나의 삶에 대한 의지를 전부 동원해야 했다. 괴로움의 시간은 옅어졌고, 나는 그토록 원하던 대학에 갔다. 


3년이 지나서야, 나는 피해자 변호사가 보내준 판결문을 읽어볼 수 있게 되었다. '피고인은 나를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음에도 미성년자이고 정서적으로 취약한 점을 악용하여 나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침해하였고, 그 이후에도 반성하지 않고 무죄를 주장하며 재판 과정에서 피해자의 친모와 피해자의 관계를 단절시켜 가족관계를 해체시키는 등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라는 내용이었다. 판결문의 한 줄 한 줄이 나의 마음을 읽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뒤늦게서야 그 피해자 변호사의 이름을 기억해내려고 애썼다. 재판을, 아니 내 삶을 포기하려고 했던 그때에는 피해자 변호사 조차 귀찮은 존재였다. 그러나 완벽한 타인임에도 나의 고통에 공감해준 유일한 사람이었다. 핸드폰에 아직 연락처가 남아있었고 나는 카카오톡 메시지를 남겼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는지 모르겠어요. 저 미소예요. 그때는 정말 힘들어서 감사하다는 이야기도 하지 못했어요. 저는 대학에 와서 즐겁게 잘 생활하고 있어요. 이렇게 갑자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감사하다는 이야기드리고 싶었어요"


하루가 지나 답장이 왔다. 무엇보다 내가 즐겁게 대학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이 너무나 기쁘다고 했다. 그것이 진심인지 인사치레 인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쩐지 기분이 좋아졌다. 누군가가 내가 평범한 일상을 살아내고 있다는 것에 기뻐해 준다는 것이, 아니 기쁘다고 말해주었다는 것이 막연히 좋았다. 


"엄마는 누구 편이야?" 내가 수백 번 묻고 싶었던 질문이었다. 핸드폰에 '엄마'라고 저장된 이름으로 전화벨이 울릴 때마다 당장 전화를 받아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왜 그 사람 편을 드냐고, 엄마는 대체 누구 편이냐고 묻고 따지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엄마의 대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 그 어떤 일이 있어도, 네가 무슨 일을 저질러도 나는 네 편이야'라고 말해주는 것이 사랑이라 생각한다. 엄마는 내가 무슨 짓을 저지르지 않았는데도, 내가 '그런' 일을 당했는데도 내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나를 버렸다. 믿을 수 없지만, 세상에 그런 엄마들이 많다고 한다.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제5조에는 친족관계에 의한 성폭력에 대해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그 친족에는 사실상의 친족까지 포함된다. 나와 같이 친족 간의 성폭력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피해자들은, 성범죄 자체에 대한 피해에 가족이 나로 인해 해체되는 고통과 믿었던 나의 가족이 피해자인 나를 버리는 상황에 대한 참을 수 없는 절망감이 더해져 헤어 나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고 만다는 것을 나는 안다. 


이제는 나와 같이, 엄마를 잃어버린, 가족이 해체되어버린 피해자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가족'이라는 당위를 우리는  벗어버릴 수 있다. 사랑해야만 했던 존재가 나를 해할 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먼저 지켜야 한다. 더 이상 가족이라는 이름만으로는 사랑과 신뢰가 담보되지 않는다. 어쩌면 나와 같은 피해자들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가족이라는 존재는 영혼 깊은 곳에 상처를 주기 가장 쉬운 존재일지 모른다. 모두가 나와 같은 피해를 입고 살아가지는 않지만, 모든 사람이 가족으로부터 위안과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고, 그것은 사람들의 희망과 이상일뿐이라는 사실로라도 우리를 위로하자고 말하고 싶다. 


난 당신의 가족이 되어 줄 수는 없지만, 내가 너를 안다고,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고, 내가 옆에 있어 준다고 슬픔에 차가워진 손을 잡고 이는 바람에 진심을 담아 홀로 비를 맞고 있을 어제의 나를 안아주고 싶다. 


이제는 엄마가 누구 편인지 묻고 싶지 않다. 

대신, 내가 당신의 편이 되어 줄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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