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내 생에 첫 필사책

by MinChive

아마 이 책, 이미 사신 분들이라면 드라마 '도깨비'에서 보고 사신 분들이 꽤 될 것 같다. 그 정도로 '심장이/하늘에서 땅까지/아찔한 진자운동을 계속하였다/첫사랑이었다.' 이 4줄이 주는 효과는 어마어마했다. 이런 것이 시의 매력인 것 같기도 하다. 하고 싶은 말을 가장 임팩트가 있게 꽂아 사람의 마음을 변화시킨다.


'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 제목을 보면 조금 얼굴이 간질간질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시집이니까 이런 제목이어도 어느 정도 감수하고 살만한 책이다. 올해의 목표가 '잘 안 보는 종류의 책들 위주로 딱 24권'이었으니까,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3월이 참 바빠서 월에 2권이라는 목표를 채우기에 제일 만만한 종류라는 이유도 한몫하여 작년 11월 말부터 오늘까지 필사를 완료하였다.


처음에는 이게 필사책인줄 모르고 샀었는데, 막상 사놓고 보니 일기에 쓸 말이 없을 때 하루에 2~3편씩 끄적끄적하기도 좋다. 약간 뭐랄까, 집에서 tv 보면서 입이 심심할 때 과자나 땅콩을 먹듯이, 딱히 뭔가 할 일은 없고 심심할 때 하루에 많이 말고 딱 2~3편 쓰는 것이 적당량이다. 시집이 그렇게 친하지 않은 종류지만, 올해의 목표가 '책 종류를 가리지 말고 읽어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시집 입문용 책이다.


이 책을 볼 때 약간 주의사항 아닌 주의사항이 있다. 어떻게 보면 당연한데, 의무감으로 자신이 공감되지 않는 시(혹은 2권-'어쩌면 별들이 너의 슬픔을 가져갈지도 몰라+플러스' 같은 경우 시 옆 페이지에 몇몇 질문을 던져놓는다. 이 질문도 마찬가지다.)를 굳이 필사까지 할 필요가 없고 쓰면 오히려 해가 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아래 '정미네'라는 시는 태어나서 서울-경기 수도권에서 자란 20~30대들에게는 잘 공감이 안될 시일 거다. 이런 시는 읽고 넘겨도 될 법하다. 필사책이라고 해서 부담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 시를 엮은 김용택 시인도 그런 마음이었지 않았을까?


인상이 깊었던 시를 몇 개 남겨본다. 이 책을 만나면서 자기 마음에 들어온 시 몇 개 정도는 이 책에서 발견하셨으면 좋겠다.

다운로드.jfif

그날 _박효환

그날, 텔레비전 앞에서 늦은 저녁을 먹다가

울컥 울음이 터졌다

멈출 수 없어 그냥 두었다

오랫동안 오늘 이전과 이후만 있을 것 같아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


* 첫 지방발령을 받고 자취를 시작하고 몇 달이나 지났을까, 밤만 되면 불쑥 찾아오는 그 이상한 느낌을 기억한다. 무언가 공허하고, 헛헛한 느낌... 밤이니까, 무시하고 잠이나 자자 하며 방치하다, 그게 시간이 지나 우울로 변하고, 그 우울이 끝내는 울음으로 표출되는 그런 순간이 있었다.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이 시를 조금 일찍 만났어야 했다.) 나만 그런 것은 아니구나 싶은 심심한 위로를 받는 시였다. 특히, 마지막 줄 '그 밤, 다시 견디는 힘을 배우기로 했다.'는 정말 멋있는 한 줄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위 네 줄만으로도 충분히 괜찮은데 저 한 줄이 시를 완성시킨 느낌이다.



정미네 _신미나

장마 지면 정미네 집으로 놀러 가고 싶다 정미네 가서 밍크 이불 덮고 손톱이 노래지도록 귤을 까먹고 싶다 김치전을 부쳐 쟁반에 놓고 손으로 찢어 먹고 싶다


새로 온 교생은 뻐드렁니에 편애가 심하고 희정이는 한 뼘도 안 되는 치마를 입는다고 흉도 볼 것이다 말 없는 정미는 응 그래, 싱겁게 웃기만 할 것이다


나는 들여놓은 운동화가 젖는 줄도 모르고 집에 갈 생각도 않는다 빗물 튀는 마루 밑에서 강아지도 비린내를 풍기며 떨 것이다


불어난 흙탕물이 다리를 넘쳐나도 제비집처럼 아늑한 그 방, 먹성 좋은 정미는 엄마 제사 지내고 남은 산자며 약과를 내올 것이다


*10대와 20대를 농촌에서 보낸 어머님들끼리 시골집에 모여 수다 떠는 모습이 그려진다. 개인적으로는 이 시를 보고 있으면 고향 생각이 나서 조금 긴데 한 번씩 쓰윽 꺼내서 읽어보는 시다.

*산자: 전통과자, 제사상에서 보던 거, 과자에 꿀 발라서 쌀 붙인... 그거 이름이 산자였구나...



사과 없어요 _김이듬

아 어쩐다, 다른 게 나왔으니, 주문한 음식보다 비싼 게 나왔으니, 아, 어쩐다, 짜장면 시켰는데 삼선짜장면이 나왔으니, 이봐요, 그냥 짜장면 시켰는데요, 아뇨 손님이 삼선짜장면이라고 말했잖아요, 아 어쩐다, 주인을 불러 바꿔달라고 할까, 그러면 이 종업원이 꾸지람 듣겠지, 어쩌면 급료에서 삼선짜장면 값만큼 깎이겠지, 급기야 쫒겨날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미안하다고 하면 이대로 먹을 텐데, 단무지도 갖다 주지 않고, 아아 사과하면 괜찮다고 할 텐데, 아아 미안하다 말해서 용서받기는커녕 몽땅 뒤집어쓴 적 있는 나로서는, 아아, 아아, 싸우기 귀찮아서 잘못했다고 말하고는 제거되고 추방된 나로서는, 아아 어쩐다, 쟤 입장을 모르는 바 아니고, 그래 내가 잘못 발음했을지도 몰라, 아아 어쩐다, 전복도 다진 야채도 싫은데


* 글쓴이의 성격이 아마 나와 매우 비슷한 분이신 거 같다. 저 상황이 너무 머릿속에 잘 그려져서 피식 웃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저 상황이 참 안쓰러워 한번 더 보게 되는 시다. 본인 의사표현에 거리낌 없으신 분들에 대해 참 부럽다는 조금은 엉뚱한 생각도 하게 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_랜터 윌슨 스미스

큰 슬픔이 거센 강물처럼 네 삶에 밀려와

마음의 평화 산산조각 내고

가장 소중한 것들을 네 눈에서 영원히 앗아갈 때면

네 가슴에 대고 말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끝없이 힘든 일들이

네 감사의 노래를 멈추게 하고

기도하기에도 너무 지칠 때면

이 진실의 말로 하여금 네 마음에서 슬픔을 사라지게 하고

힘겨운 하루의 무거운 짐을 벗어나게 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행운이 네게 미소짓고

하루하루가 환희와 기쁨으로 가득 차

근심 걱정 없는 날들이 스쳐갈 때면

세속의 기쁨에 젖어 안식하지 않도록

이 말을 깊이 생각하고 가슴에 품어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너의 진살한 노력이 명예와 영광

그리고 지상의 모든 귀한 것들을 네게 가져와 웃음을 선사할 때면

인생에서 가장 오래 지속된 일도

가장 웅대한 일도

지상에서 잠깐 스쳐가는 순간에 불과함을 기억하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무한 야근 시즌에 붙여놓고 마음을 다스리는 시다. 그래 뭐 언젠가는 끝나겠지....라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등을 밀며 _손택수

아버지는 단 한번도 아들을 데리고 목욕탕엘 가지 않았다

여덟살 무렵까지 나는 할 수 없이

누이들과 함께 어머니 손을 잡고 여탕엘 들어가야 했다

누가 물으면 어머니가 미리 알려준 대로

다섯살이라고 거짓말을 하곤 했는데

언젠가 한번은 입속에 준비해둔 다섯살 대신

일곱살이 튀어나와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나이보다 실하게 여물었구나, 누가 고추를 만지기라도 하면

잔뜩 성이 나서 물속으로 텀벙 뛰어들던 목욕탕

어머니를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커버린 뒤론

함께 와서 서로 등을 밀어주는 부자들을

은근히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곤 하였다

그때마다 혼자서 원망했고, 좀 더 철이 들어서는

돈이 무서워서 목욕탕도 가지 않는 걸 거라고

아무렇게나 함부로 비난했던 아버지

등짝에 살이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본 건

당신이 쓰러지고 난 뒤의 일이다

의식을 잃고 쓰러져 병원까지 실려온 뒤의 일이다

그렇게 밀어드리고 싶었지만, 부끄러워서 차마

자식에게도 보여줄 수 없었던 등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

적막하디적막한 등짝에 낙인처럼 찍혀 지워지지 않는 지게자국

아버지는 병원 욕실에 업혀 들어와서야 비로소

자식의 소원 하나를 들어주신 것이다


*모든 부모들이 다 좋은 부모는 아니지만, 좋든 싫든 우리들은 어쨌든 누군가의 '자식'이기에 이 시를 그냥 지나치지는 못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 모두는 어쩌면 누군가의 '시커멓게 죽은 지게자국'을 만든 사람이자, 그 지게자국을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해 지면 달 지고, 달 지면 해를 지고 걸어온 길 끝'을 제일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일 것이므로.


저녁을 단련함 _이병률

매일 한 차례씩 같은 시간에 모기에 물린다면

우리는 모기를 힘들어하지 않을 뿐더러

그 작은 모기에게 사자처럼 굴지도 않을 것이다


꼿꼿하게 앉아도 되는 저녁이므로

지나치게 균형을 잃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매일 한 차례씩

알람을 맞춰놓고 같은 시간에 모기에 물린다면

먹고 사는 일에 다짐 따윈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남은 저녁은 좀 더 단정히 피가 통할 것이며

맨발의 급소들도 순해질 수 있겠다


봉합이 필요한 시간에

모기에 물리자고 팔뚝을 내놓는다면

시간의 딱지들은 도톰해질 것이다


저녁의 바닥을 향해 서 있는 것 모두를

진창이라 여기지 않아도 되겠다


서서히 가려우므로 괜찮아진다

하물며 최선도 지나간다


피하느니

제법 지나갈 것이


* 모기에 물리는 상황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신기해서 옮겨놓은 시다. 이 책에서 본 발상 중에 가장 기발해서 뇌리에 오래 기억이 남았다.




다운로드.jfif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4. 월급쟁이 재테크 상식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