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드 코로나, 그 시작에서
2019년 12월에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는 거의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러 우리의 일상 중 한 부분이 되어버렸다. 이 전염병은 이미 우리의 삶 중에 많은 것을 바꿨고, 지금도 많은 것을 바꾸고 있으며, 또 언제 끝날지를 모르니 많은 것을 바꿀 것이다. 이 병이 시작되고 갑자기 주목을 받게 된 책이 이 '페스트'이다. 사실 이 책을 읽은 지는 꽤 되었다. 그러나 이 책의 이야기는 우리가 마스크를 벗으면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이 책 리뷰의 제목에 12라고 달아놓고 차일피일 미루다 11월이 되었다. 이 메거진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신 분은 없으시겠지만, 목록을 보다 보면 11과 13사이에 번호가 없다는 것을 아신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브런치에 이 기능이 있는데 내가 못 찾는 것인지, 발행 후 글의 배치 순서도 바꿀 수 있다면 좋으련만, 일단은 못 찾겠다.) 아직 이 병마와의 싸움이 끝난 것은 아니지만 오늘부터 시작되는 위드 코로나 기사를 보다가 이 리뷰를 끝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도 바로 앞에 리뷰한 '이방인'을 쓴 알베르 카뮈의 작품이다. 카뮈의 작품들에서 대표적으로 많이 읽는 3개 작품(이방인, 시지프 신화, 페스트) 중 하나이다. 사실, 앞선 이방인 리뷰에서 말했듯 이미 '이방인'이라는 작품 때문에 썩 손이 가지 않던 카뮈의 작품을 한 해에 2권이나 본 것은 도전이었다. 물론 이방인에 비해 이 책이 조금 더 이해하기가 쉽고 읽는 재미가 있었다.
이방인에서도 느꼈지만 묘사가 정말 탁월하다. 우리가 훌륭하다고 하는 작가 중에 안 그런 사람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카뮈는 특히나 더한 것 같다. 특히, (이게 이 코로나 시국을 지나는 중이라 그렇게 느끼는지는 모르겠다.) 청각과 시각적인 묘사가 뭐랄까, '정확하다'보다는 '민감하다'는 말이 더 어울려 보인다. 11시 이후 등화관제 후의 고요함 속에서도 들리는 듯한 도시의 웅성거림, 소음을 표현하는 부분이 곳곳에 나오는데, 지금은 나아졌지만 한때 한국의 11시를 보는 듯했다.
"(....) 으레 도시의 언어를 이루게 마련인 차량과 기계 소리들 대신 둔탁한 발소리와 목소리가 빚어내는 거대한 웅성거림뿐이었는데, 그것은 무겁게 덮인 하늘로부터 나오는 윙윙거리는 재앙의 휘파람 소리에 리듬을 맞추는 수천의 구두창들이 고통스럽게 미끄러져가는 소리였으며, 차츰차츰 시가를 가득 채우고 있는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 그리고 그 당시 우리의 마음속에서 사랑의 자리에 대신 들어앉은 맹목적인 고집에다가 저녁마다 가장 충실하고 가장 음울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던 저 끝없고 숨 막히는 제자리걸음 소리였기 때문이다."
제자리걸음. 솔직히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 병이 치료제가 나온다는 뉴스가 지금에서야 이 뉴스 저 뉴스에서 나오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 병이 우리 곁을 떠나지 않고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는 중이라고, 그런 거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이런 묘사는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두 번째로 인상이 깊었던 장면은 오통판사의 아들(=어린이)의 죽음을 묘사한 장면이다.
"어린애는 몸을 바싹 오그렸고 전신을 태워버릴듯한 불꽃의 공포에 질려 침대 밑바닥으로 파고 들었다. 그리고. 담요를 걷어차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불타오르듯 뜨거워진 눈꺼풀 밑에서 솟아 나오는 굵은 눈물이 납빛이 된 얼굴 위로 흘러내리기 시작했고 기진맥진해진 아이는 뼈가 드러나 보이는 두 다리와 살이 완전히 녹아 버린 듯한 두 팔에 경련을 일으키면서 황폐해진 침대 위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듯한 괴상한 자세를 취하는. 것이었다."
보고 있기가 괴롭고 힘들다. 심지어 이 장면 뒤에 리외와 타루가 랑베르의 집에 찾아갔을 때, 랑베르가 St. James Infirmary라는 노래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데, 리외와 타루가 이 음악이 좋아서 듣고 있느냐 묻자, 랑베르가 음악을 좋아하는건 아니라며 내던진 한마디가 뼈를 때린다 "페스트란 바로 처음부터 자꾸 다시 시작하는 게 특징이라니까요" 이렇게 시각적으로 청각적으로 소설의 부분 부분을 채우는 능력이 정말 인상적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QzcpUdBw7gs
이 작품에 나오는 여러 상황과 인물들은 지금도 우리 옆에서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다. 나와는 상관이 없다며 일단 도망을 치려는 사람(랑베르), 이 혼란을 틈타 오히려 이득을 보는 사람, 묵묵히 자기 할 일을 하며 지내는 사람(리외, 그랑 등), 이 고난을 넘기 위해 신앙으로 눈을 돌리는 사람들과 그들에게 설교하는 신부(파늘루, 아무래도 카뮈는 종교에 대해 이방인 때도 그렇지만 그렇게 좋은 시각을 갖고 있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사태를 현실적으로 보고 정면으로 맞서려는 사람(타루), 도대체가 이게 어딜 봐서 70년대에 쓰인 소설인지 모르겠을 정도로 우리의 모습과 흡사하다.
상황 또한 마찬가지다. 온갖 거짓 뉴스(기름 바른 레인코트, 박하사탕)가 나오는 상황, 그 가짜 뉴스로 인해 이득을 챙기는 사람들, 죽음의 역병을 앞에 두고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디리케라는 오페라를 보는 사람들 ("너 나 할 것 없이 거리로 나와 서로를 탐한다. 심상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자 쾌락과 향락을 떠올린 것이다."), 너도 나도 교회에 모여 파늘루 신부의 이야기를 들으며 종교에 의지하는 모습, 그로 인해 페스트가 더 퍼지고 거기에 대고 페스트가 신의 심판이라고 회개하라 하는 종교인의 모습 등 우리가 이미 겪었던 '극한에 처한 인간이 얼마나 비이성적이 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런 고난의 모습 아래에서 카뮈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는 결국 리외와 보건대의 모습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첫째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랑베르와 리외의 대화였다. '나는 영웅주의를 믿지 않습니다. 내가 흥미를 느끼는 것은 사랑하는 것을 위해 살고, 사랑하는 것을 위해 죽는 것입니다.'라는 말에 리외는 '이 모든 일은 영웅주의와 관련이 없습니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이라고 생각해요. 성실성이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입니다.' 이 말에 대해 조금 깊게 생각해보게 된다. 사실 요즘은 '성실성'이라는 가치가 예전만큼의 지위를 갖지 못하는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요즘은 성실하더라도 방향이 잘못된 성실함을 너무나도 많이 보기 때문인 것 같다. 맹목적 성실함은 간혹 멍청함으로 보일 때도 많다. 카뮈는 성실성이 어떤 '성실함'이냐에 대한 물음에 대한 카뮈의 답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는 단순하지만 굉장히 중요한 답변을 내놓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랑베르의 변화였다. 그렇게나 밖으로 나가려고 했던 그가 보건대에 들어오고 나서, 드디어 그가 그렇게나 기다리던 도시를 빠져나갈 기회가 생겼음에도 '그러나 나도 이제 이곳 사람이라는 것을 알겠어요. 이 사건은 우리 모두와 관련되어있으니까요.'라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의 변화가 잘 보인다. 사람들이 고난을 뛰어넘을 때는 언제나 이런 것들이 나타나고, 필요하다고 느껴진다. 혼자서는 절대 안 될 일, 답이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함께'하면 우리는 늘 답을 찾아왔다. 여기서 나오는 '보건대'라는 의료자원봉사대는 결국 소설 속의 모든 이들이 뭉친 연결이자 연대감을 나타낸다. 그렇다고 이들이 '영웅'처럼 고귀한 존재들은 아니다. 평범한 의사, 자기만의 소설을 쓰겠다고 단어 하나 고르는데 몇 달은 걸리는 면서기(=공무원) 등 우리 옆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렇게 카뮈는 '(방향이 제대로 잡힌) 성실성'과 '연대감'을 극한의 상황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이 책을 리뷰하면서 다시금 이 책을 뒤적이는데, 마지막 부분이 참 눈에 걸린다. '도시에서 올라오는 환희의 외침을 들으며, 나는 그러한 환희가 여전히 위협받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기쁨에 젖어있는 군중은 모르는 사실, 즉 페스트균은 결코 죽거나 소멸하지 않고 꾸준히 살아남았다가 언젠가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쥐들을 다시 깨우고 사람들을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을 나는 알고 있었다.' 위드 코로나, 분명 반길만한 점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불안한 것도 사실이다. 나 역시도 이제서야 얼굴 좀 볼 사람들에 대해, 그들의 그간 안부에 대해 궁금하고 '만남' 그 자체를 기대한다. 다만, 내 몫의 '성실함' 정도는 생각을 하게 되는 아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