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나서 바로 쓰는 간단 후기
요근래 들어서 가장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영화 오펜하이머, 놀란 감독의 신작을 보고 왔다. 뛰어났지만, 끝내 자신을 '멍청이'라고 칭했던 과학자 오펜하이머의 일대기를 그린 영화다. 심지어 의미심장하게도 23년 8월 15일 광복절에 개봉을 하였다. 러닝타임 180분, 이 긴 시간을 꽉 채운 영화는 극장에서 나왔을 때 사람들의 반응도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일단, 나는 호불호 중에 '극호'에 속하는 사람으로, 같은 영화를 보고 '극불호'를 외친 친구와 했던 이야기를 통해서 이 영화를 한번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이 영화는 아주 크게 보면 이야기가 사실 두 가지이고, 그 두 이야기가 섞여서 진행되는 방식이다. 그리고 감독은 이것을 컬러로 구분을 했다. 처음에는 컬러로 진행되는 부분은 1953년도 원자력 에너지 위원회 청문회, 즉 오펜하이머의 파트가 나오고, 흑백으로 진행되는 부분은 1959년 스트로스 상원 청문회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봤는데, 여기서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심지어 화면비로도 영화가 나뉘는 것도 볼 수 있다. 2.20:1 비율과 1.43:1로 나뉘어지는데, 이것은 역사적 사실과 오펜하이머의 관점과 심리 등 네러티적인 장면의 구분으로 사용되었다. (사실 이걸 모르고 봐도, 내용 이해에는 전혀 상관이 없다.)
거기다 나오는 인물이 많은데 그 많은 인물 중에 거를 타선이 없다.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하이젠베르크, 에드워드 텔러, 리처드 파인만, 엔리코 페르미.... 그 외에도 조연급도 아닌 스쳐가는 인물들로 잠깐씩 언급되거나 등장하는 인물들이 있는데, 다 하나같이 과학, 특히 물리학에 지대한 영향을 줬던 걸출한 인물들이다. 물리학과 역사를 어설프게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인물정보가 꼬이면서 영화에 집중을 못한다.
그리고 여기에 3시간이라는 긴 러닝타임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진행 속도가 굉장히 빠르고, 결정적으로 시간순서대로 이야기가 진행되지 않는다. (이렇게 시점이 여러번 옮겨가는데, 이 정도 몰입감을 줄 정도면, 굉장히 유기적으로 구조를 짰다는 것을 알게되고, 그 사실에 소름이 돋는다.) 폭발 장면이나 액션의 측면보다는 대부분이 대사로 이어지기에 내용도 많다. 댓글 중에 영화 중간에 너무 화장실이 급해서 잠깐 다녀왔는데 흐름을 놓쳐서 힘들었다는 댓글도 봤는데, 진짜 그렇다. 거기다 씬과 그 안에 쇼트도 많아서 더더욱 그렇게 느껴졌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같은 장면이 중간중간 계속 삽입이 되는 것이 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소재인 핵분열을 연상케 한다.
마지막으로, 대부분의 놀란 감독의 영화가 그렇듯, 영화가 친절하지 않다. 사전에 정보가 없다면, 뜬금없이 나오는 피카소 그림같은 장면을 보면 당황을 할 수밖에 없다. 저게 갑자기 왜 나오는거야? 그러다 다음 장면을 놓친다. 고로 이 영화를 볼 때는 장면 하나하나보다 인물이 갖고 있는 생각의 흐름에 올라타서 거기에서 내리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만약 영화를 보면서 '머리를 식히고 싶다'는 생각이라면, 당연히 이 영화는 아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해하고 싶다, 머리를 굴리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는 생각이라면 강하게 추천한다.
특히 내가 보았던 것은 극히 달라보이는 두 사람, 즉 오펜하이머와 스트로스를 묶어주는 감독의 방식이 마음에 들었다. 두 사람은 참 다르다. 한쪽은 시대를 대표하는 천재 중에 한 사람이고 한 사람은 오펜하이머의 말을 빌리면 '미천한 구두 판매원'인 평범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은,
1. 청문회를 재판처럼 대하는 태도로 임하여 지적을 받는다
2. 타임지 표지에 얼굴이 실린다
3. 대통령에게서 상을 받는다
4. 인생의 중요 순간에 청문회로 인해 파멸의 길로 간다
5. 스트로스의 대사: "파멸당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나를 파멸시키려는 사람이 나를 벌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몰아내려고 했기 때문"<- 이 말이 오펜하이머, 스트로스 두 사람 모두에게 해당이 된다.
이렇게 짜내는 것도 쉽지 않은데 감독은 끊임없이 장면장면을 통해 그들을 대비시킨다. 이런 포인트들이 몇가지 더 있는데, 그것을 보며 영화를 따라가는 것이 이 영화를 재미있게 볼 수 있도록 도와줄 거 같다.
이건 솔직히 광고의 잘못이 크다. CG를 최대한 사용하지 않겠다는 놀란 감독의 의지에 따라, 그의 영화 대부분은 미니어처를 사용하여 원근감을 이용하는 방식을 쓰거나, 정말 그런 세트장을 만든다거나 하는 색다른 방식으로 장면을 만들어낸다는 걸 우리는 안다. 그럼에도 우리는 예고편을 보면서 핵폭발 장면을 '기대'했다. 핵폭발은 아니더라도 뭔가 '큰 거 한방'을 원했던 사람들은 아마 실망했을거다. 놀란 감독은 이걸보고 "최대한 오펜하이머의 관점에서 보려고 했다. 오펜하이머 역시 라디오로 공습소식을 들었을 뿐이었기에, 그렇게 표현했다."고 했다. 사실 이 폭발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서 사람들에게 카타르시스를 주는, 조금은 엔터텐테인먼트적인 요소로 넣는다는 가정을 했을 때, 이 영화의 흐름이 깨질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이 그 장면을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는 솔직히 부족하다고 느끼지 않았다. 블록버스터 처럼 시원하게 뭘 쏘지는 않지만, 음악과 사운드, 그리고 폭발을 은유하는 천체의 폭발 장면 같은 것으로 충분히 사람들을 긴장시킨다. 블록버스터가 자연 재해급 큰 폭풍으로 우리를 휩쓸고 지나간다면, 이 영화는 소규모~중규모 태풍이 계속 우리와 머무는 느낌이다.
또한 이 영화가 단순히 인물 전기 영화처럼 다이내막한 부분이 없거나 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어지간한 액션 영화보다 더한 다이내믹이 오펜하이머 내면에서 펼쳐진다.(그걸 연기하는 킬리언 머피의 표정과 세밀한 감정묘사는 이 영화의 압권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이 영화는 초호화 캐스팅인만큼 연기의 구멍이 없다.) 이 영화의 진짜 핵폭발은 내가 보기엔 트리니티 실험이 끝난 뒤부터 시작된다. 강당에서 연설하는 오펜하이머의 눈에는 그의 상상이 만들어낸 섬광 속에서 피부가 박리되는 사람들이 보인다. 트루먼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는 자기 손에 피가 묻은 느낌이라고 하는 대사가 마음에 콕 박힌다. 핵실험이 끝나고 나서의 상황이 (이 영화의 한 3/4정도에서 끝까지) 나한테는 오히려 더 숨막히고 긴장되고 생각이 많아지는 시간이었다. 그 많은 생략과 은유가 오히려 사람들이 더 생각하고 고민하게 만드는 것이다.
- 늘 그렇듯,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모순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원자폭탄을 개발했지만, 후에 누구보다 핵무기를 반대했던 모순적인 오펜하이머. 아무리 위대한 과학자여도, 결국 정치적인 관계에서는 한없이 평범하고 약하디 약한 오펜하이머. 우리는 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 곁다리처럼 들어가지만 과학자들간의 의견대립도 이 영화가 주는 중요 포인트이다. 나라면 어떤 생각을 할까?
-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오펜하이머도 오펜하이머지만 스트로스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아진다. 특히 오펜하이머의 청문회의 모든 판을 짠 것이 그라는 것이 밝혀지는 순간의 느낌은 참 묘하다
- 감독에게 영감을 주고, 원작이라고 불러도 될만하다는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도 같이 한번 보면 좋을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