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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inChive Jun 18. 2024

편견, 인간의 오랜 고질병

매일 아침 끄적이기 - 4

유튜브 클립들을 보다가, 요즘 어떤 연애 프로그램에서 MC와 게스트 패널들이 출연자들의 행동을 보며 대화하는 장면을 봤다.


"다들 동의하시지 않을까 싶어요, 어린 시절에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이 어른이 돼서도 타인과 사랑의 감정을 잘 주고 받는 것 같아요, 안 그래요? 하하!"

그러자 패널 사람이 못마땅하다는듯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전 동의할 수 없어요."

다소 날이 서 있는 패널 출연자의 이야기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속으로 뜨끔했다. 나 역시 한편으로는 사회자의 말에 어느 정도는 공감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그 말 뒤로 묻고 싶었던 것은 사실 ' 어릴 때 사랑을 받고 자라지 못했다면 사랑할 자격도 없다는 뜻인가요?' 가 아니었을까?


사랑에 둘러싸여 정서적으로 민감한 시기를 보내는 아이가 그렇지 않은 아이에 비해 정서적으로 안정적이고, 나아가 사랑이라는 감정에 익숙해진다는 데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진 않다. 그건 사실이니까. 다만, 사랑에 익숙해지는 것과 사랑을 잘 표현하는 것은 별개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어릴 때 사랑을 많이 받더라도 훗날 사랑에 서툰 어른이 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상대적으로 덜 사랑받고 자랐음에도 사랑을 최고의 가치로 여겨 상대에게 정성을 다하는 소위 '사랑꾼'이 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단순히 사랑을 받았느냐, 받지 않았느냐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많이 볼 수 있는 편견이다. 더욱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어떤 사정으로 어린 시절 부모와 떨어져 자란 나같은 사람에겐 "사랑을 받아본 사람만이 사랑을 줄 수 있습니다."라는 말은 자칫 상처가 될 수도 있는 노릇이다. 그럼에도 저 사회자의 말에 공감한 나를 보며, 혼란스러웠다. 적어도 나는 그런 소리를 하면 안됐는데.


편견에 대한 사전적 정의는 공정하지 못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생각이다. 편견을 품지 않는 사람은 당연히 없다. 사실 편견이라는 것은 우리 인류가 살아남기 위한 본능 같은 것이었다고 한다. 우리 인간은 신체적으로 자연에서 살아남기 힘든 구조를 지녔다. 그렇기에 우리 선조들은 원시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눈 앞에 있는 대상들을 빠르게 분류하고 판단을 내려야만 했다. 늦은 판단은 곧 죽음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어떻게 보면 적어도 편견은 '생각의 지름길' 같은 것이고, 인류의 생존에 어느 정도 공헌은 했다고 생각한다.


다만, 편견이라는 녀석은 자기중심적이다. 편견이 눈을 사로잡으면 시야도 좁아져서 타인에 대한 관심이 눈꼽만큼도 없어진다. 심지어 그것을 내 안에만 가지고 있지 않고 밖으로 내뱉는 추악한 짓도 서슴없이 한다. "저 사람 참 성격이 별로다. 그쵸?" " 아... 저러니까 일이 더디지, 답답하지 않아요?" 등등 셀 수도 없을거다. 그런 편견은 대략 3:7의 비율로 안 맞을 확률이 높다. 그 확률이 안 맞을 때는 '첫인상과는 참 다르네' 하며 반성을 하게된다. 심지어 이 과정도 내가 편견에 빠져있다고 인지하게 되는 어떤 계기가 있어야 자각이 된다. 그 자각의 순간이 없어서 아직도, 그리고 앞으로도 갇혀 살아야 할 편견이 여전히 내게 있을 것이고, 당신에게도 있을 것이다.


해결책은 어디에 있을까? 편견의 극복이라는 큰 것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다만, 우리 사이의 편견을 완화하는 방법이 어딘가에는 있지 않을까?


이 화두는 이전에 '고립의 시대' 책 리뷰에서 잠깐 얘기했던 것처럼, 온라인이 아닌 오프라인 만남 증가가 열쇠가 될 수 있을 것 같다. 이전에 알쓸신잡에서 유현준 교수가 (정확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유럽의 거리를 거닐면서 광장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공원과 벤치의 필요성을 언급했던 적이 있다. 한국 사람들이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무조건 배척하고 보는 배경에는 물리적으로 접촉할만한 공간이 적은 탓이라고 이야기를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아무리 밉고 이해가 안되는 친구여도 직접 만나 학교 운동장에서 놀거나 조금 커서는 술잔을 기울이다보면 어느 정도는 '에휴... 그래 너나 나나 참 못났다' 하며 내 생각을 고쳐먹고 서로를 인정하기도 한다. 요즘은 학교 운동장 같은 부담없는 장소가 적다. 아이들이 뛰노는 운동장도 점점 좁아지고, 놀이터 부지도 점점 줄어든다.


물론 갑자기 공원과 벤치같은 공간이 많아진다고 하루 아침에 편견이 없어지지는 않겠으나, 소통을 위한 공간과 시설이 지금처럼 줄어든다면 상황은 확실하게 더 악화될 수밖에 없다. 그때는 아마 이 '편견'이 만들어낸 괴물이 한국 사회를 정말로 집어삼킬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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