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스, 잔인하고 찌질한 여자
2025년 국제도서전에 갔을 때 본 글이다.
"훌륭한 책들은 모두 지루한 부분이 있고, 위대한 삶에도 재미없는 시기가 있다."
<행복의 정복>이라는 1930년대의 고전 철학서에 나오는 구절인데 이 문장은 그날부터 내 마음속 명언으로 자리 잡고 있다.
벽돌책도 지루한 일상도 순간을 견디면 다시 즐거움을 찾을 수 있다는 내 믿음에 힘을 더해주는 문장이랄까? 그런데 버트런드 러셀(Bertrand Russell)은 저 책을 쓸 때 재미없는 시기였을까? 그 시기가 지나간 뒤였을까? 조만간 행복의 정복을 읽어봐야겠다.
라고 글을 쓴 지 반년이 지나 <스토너>를 완독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루함의 미학을 이뤄낸 것인가?
근데 막상 다 읽고 나니 이 책은 지루함의 미학을 논하기엔 너무나 슬프고 처절한 소설이었다.
윌리엄 스토너가 자신이 좋은 교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은 뒤 서서히 변화한 모습이 이디스의 변화를 더욱 강화시키다 못해 결국은 뾰족하고 흉포하게 만들어버렸다.
이디스는 아버지의 장례식에서 이상할 정도로 감정의 동요가 없었다.
<스토너>, 존윌리엄스 지음
이디스는 스토너에게 상대적 박탈감(?) 뭐 그런 걸 느낀 거겠지?
유일한 안식처인 서재를 빼앗는 장면을 읽을 때는
‘와 미친 여자’라고 입 밖으로 욕도 했다.
모든 걸 서서히 통제하며 딸 그레이스와의 관계도 망가뜨리고 스토너의 영혼까지 죽이려 하는 것 같았다.
남을 통제하고 괴롭히며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려 하는 진짜 불쌍한 인생을 사는 이디스, 잔인하고 찌질하다 생각했다.
스토너는 왜 그 똑똑한 머리로 이디스를 내쫓지 않고 회피와 침묵으로만 일관했을까?
학문을 연구할 에너지를 지키기 위함이었나?
책임감? 이디스처럼 미성숙한 저속함으로 대응하기 싫어서?
아… 캐서린과 바람 폈지; 근데 나는 그게 생존을 위한 산소 호흡기처럼 보였다. 정당화되는 건 아니지만 그만큼 답답스러웠다는 것.
스토너의 무기력한 인내심이 대단해 보였다.
무기력했기에 그 모든 걸 인내할 수 있었던 걸까,
아니면 너무 오랜 시간 인내해 왔기에 결국 무기력해져 버린 걸까.
스토너가 잃어버린 생동감이라고는 없는 무기력함은
너무나 슬프게 기억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