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달린다는 것에 대하여
난 평소 A님에게 뭐 그리 할 말이 많았는지. 우리가 서로에게 가진 마음 크기만큼은 자주 만나는 사이가 아니어서일까요. 이 편지는 내가 A님에게 보내는 두 번째 편지. 우선, 선물과 함께 보냈던 첫 번째 엽서를 좋아해주어서 정말 고맙습니다. 그러고도 또 보내는 두 번째 편지는, 그때 엽서에 다 못 썼던 말, A님의 결혼식 후에 장문의 카톡을 보내놓고도 못내 아쉬워서 쓰는 미련한 글입니다. 내가 참 그래요. 미련이 많아요, 무엇에든.
내가 A님을 처음 안 건 2년 전 가을쯤일 거예요. 우리가 지금 몸담은 크루에서 A님이 막 풀마라톤을 준비하려던 때였지요. 눈매도 입가도 심지어 다리길이조차도 시원시원한 미녀인 A님이 나는 첫눈에 좋았는데, 눈에 띄는 외모보다 성격이 진국인 걸 아는 데에도 얼마 걸리지 않았지요. A님은 누구나 어디서나 좋아할 만한 사람이에요. 언제나 성실하고, 밝고, 무엇보다 다정하니까요.
좋아서 시작한 달리기였지만, 좋기만한 것도 아니더라구요, 달리기가요. 참 이상하지요. 고작 달리기인데, 취미일 뿐인데, 그게 이렇게 사람 마음을 울렁거리게 할 줄은 몰랐어요. 실력이 안 늘면 자책하고, 타고난 것도 없으면서 노력도 안 하는 스스로를 낮잡게 되고, 그렇게 마음을 다쳐요. 그런데 그걸 못 놓겠는 거예요. 에이, 안해! 했다가도 바람이 선선하고 하늘이 맑으면 어디로든 달리고 싶어져요.
나는 무엇에든 참 느리게 아주 조금씩 나아지는 사람인데, 달리기도 그렇더라고요. 남들은 시작한 지 1년, 몇 개월 안에도 완주하는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하기까지 5년이 넘게 걸렸으니까요. 그것도 많은 사람들의 격려와 지원 속에서 겨우겨우, 간신히. 연습하는 동안에도 마음을 참 많이 다쳤네요. 누가 준 것도 아니고 내가 스스로 받은 상처로요. 그럴 때마다 다정한 A님이 나를 수렁에서 꺼내줬지요. 지치지도 않고요.
달리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 입장에서 보면 우린 참 이상한 사이예요. 남들은 늘어지게 자는 일요일 아침마다, 계절도 상관없이 모여서, 어딘가를 달리고 헤어지니까요. 우리의 달리기 선배님인 K님, 우리의 정기모임날마다 1시간 먼저 집결지에 오셔서 A님과 함께 달리시던 K님을, 우리 엄만 정말 이상하게 생각하셨어요. 가정이 있는 중년 남자가 너랑 같이 달리려고 안양에서 성수동까지 주말 아침에 온다구? 웃기죠? 우리에겐 너무나 감사한 선배님인데요. 선배님 덕분에 우리는 각자의 풀코스 마라톤을 어떻게든 완주할 수 있었는데요.
달리기 덕분에, 우리 각자의 인생이 이렇게나 다채로워졌는데요.
A님이 시카고마라톤에 가기까지 얼마나 우여곡절이 많았는지, 자세히는 몰라도 대강은 알아요. A님이 지금의 짝꿍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마음도 짐작이 되고요. 달리기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에게, A님이 시카고마라톤을 완주하는 이야기가 무어 그리 흥미로운 이야기이겠어요. 하지만 A님의 달리기 친구들은 모두 알지요. 싸락눈이 치든 부슬비가 내리든 새벽마다 운동화 끈을 묶고 집을 나서는 A님의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 A님이 시카고마라톤을 달릴 때 시차도 무시하고 인터넷으로 함께 응원하던 사람들의 마음이 얼마나 애탔는지.
A님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몸담은 크루가 아니었다면, 나는 몰랐겠지요.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뽀득뽀득 소리를 내며 달리는 것이 얼마나 상쾌한지, 폭우가 쏟아지는 날 사람들과 물웅덩이를 찰방거리며 뛰는 것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주말마다 함께 노래를 흥얼거리며 달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그리고 마라톤대회장에서 애를 태우며 주자를 기다리는 심정을, 달린 거리만큼 기부하기 위해 달마다 꾸준히 달리기 계획을 세우는 마음을, 오로지 여자친구의 해외마라톤을 응원하기 위해 함께 비행기를 탔다는 남자와 드디어 결혼하는 달리기친구의, 웨딩드레스 입은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의 울렁거림을. 몰랐겠지요, A님이 아니었다면요. 그래서 고마워요, 달리기와 A님에게, 우리의 크루에게. 나의 인생을 다채롭게 해주어서.
무엇보다 A님은 나에게,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사람일 수 있다는 확신을, 희망을 줍니다. 그게 참 고마워요. 내가 A님을, '나만의 자존감지킴이'라고 혼자 부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답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충분히 좋은 사람이고 싶거든요. 그걸 위해 노력하고 있거든요, 언제나. 그게 안 되는 것 같아서 늘 실망하고요. 그런데 A님은 그런 나에게, 충분한 믿음과 사랑을 줍니다. 그게 참 고마워요, 언제나.
나는 모든 사람 각자가 한 권의 책이라고 생각해요. 그 사람 안에 인생이라는 이야기가 담겨있지요. 그걸 읽는 걸 좋아해요. 이따금 상처받기도 하고, 그래서 서글프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읽는 것을 멈추기란 어렵네요. 내게 A님은 언제나 읽고 싶어지는, 궁금한 책입니다. 그래서 앞으로도, A님이 짝꿍과 함께 써나갈 달콤한 이야기도, A님이 혼자 주로에서 써나갈, 때로 고통스럽고 때로 환희에 찬 이야기도 모두 기대돼요.
그래서 오늘도 편지를 씁니다. 눈부신 드레스를 입고 이효리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며 신부 입장을 하던 A님의 발랄한 모습은, 우리의 달리기 친구들이 예쁘게 멋있게 사진이나 영상으로 남겨주었겠지요? 나는 차마 그런 재주는 없어, 대신 이렇게 편지를 씁니다. A님, 앞으로도 나와, 우리와 함께 건강하고 재미있게 달려요, 어디로든. 우리는 날이 궂어도 맑아도, 함께 달리면 조금 더 재미있게, 조금 더 멀리 달릴 수 있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