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의 단편소설 '회복하는 인간'에 대한 짧은 이야기
최근에 조금 아팠다. 연말부터 연초까지가 특히 바쁜 직장의 특성 때문에 스트레스 받을 일도 꽤 있었고, 연말을 반성하며 새해에 벌려놓은 개인적인 일들도 많았다. 이래저래 몸과 마음에 이것저것 쌓아만 두고 있다가, 한꺼번에 터졌다. 원래도 소화계통에 장애가 있었는데,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위와 담낭에 무리가 많이 갔나보다. 연말에는 담낭에 삽관술을 받았고, 올 연초 들어서는 위경련을 앓았다. 연말부터 연초까지 몸과 마음이 전부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25년 1월도 다 가는 중이다. 뭘 했다고.
그러나 나이가 들어 좋은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나이를 먹어가며 쌓은 경험들이 어디 가지 않고 내 안에, 고스란히 남아있다는 점이다. 그 경험들이, 내 몸과 마음이 아플 때, 내가 무엇을 먼저 해야 하는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덕분에 (쌓인 나이만큼 자주 아프긴 하지만) 그만큼 회복탄력성도 생긴다. 내 경우엔 몸이 아플 때 읽는 책이 따로 있다. 책이 약이 된다고? 좀 웃긴 얘기긴 한데, 적어도 내겐 그렇다. 마음 문제로 몸이 아픈 경우엔 더욱 그렇다.
참다참다 병가를 쓴 날, 병원을 다녀와 집에 콕 박혀 읽은 책은 한강의 단편집 <노랑무늬영원>이다. 소설가 한강이 2003년부터 2012년까지 쓴 총 7편의 단편을 엮은 책이다. 보통 단편집은 각 단편의 배치도 소설집 전체의 주체를 관통하는 데 사용된다. 이 소설집도 대체로 그렇다. '밝아지기 전에'와 '왼손'을 기점으로 전반부는 한강의 소설 세계에서 흔히 보이는, 세계의 폭력 속에 무력해진 나약한 인간상을 다루며, 후반부 '파란 돌'과 '노랑무늬영원'은 그런 나약한 인간상이 어떻게 상처를 극복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지에 대해 다룬다.
전날 점심부터 다음날 아침까지 단 한끼도 제대로 먹지 못한 속이라 병원에서 초음파검사를 받기는 좋았다. 늘 그렇듯이 신경성 위염이었고, 늘 그렇듯이 약을 지어 집으로 돌아왔다. 옷을 갈아입고, 꺼두지 않은 전기장판 덕분에 따땃한 침대 속에 들어가 누워, 첫 번째 단편인 '회복하는 인간'을 읽다가, 문득 아주 조금 울었다. 정말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나이 마흔을 훌쩍 넘겨, 몸이 조금 아프다고 집에 박혀 우는 여자라니. 실은, 아파서도 그랬지만, 소설 속 '당신'의 마음이 내게 이상하게 사무쳤다.
'회복하는 인간'은 2인칭으로 쓰인 소설이다. '당신'이 병원에서 화상 치료를 받는 장면으로 소설은 시작된다. 의사는 당신에게 이렇게 회복 속도가 더딘 경우도 없다고 말하고, 당신은 담담하게 화상 치료를 받는다. 당신이 큰 화상을 입게 된 경위에는, 친언니의 죽음이 있다. 당신이 어려서부터 사랑했으나, 당신의 사랑을 외면해온 언니는, 당신과 여러 면에서 다른 사람이었다. 당신이 수수하고 담담한 사람인 반면, 언니는 늘 화려하고 아름다웠다. 그럼에도 언니는 당신에게 내내 열패감을 느껴왔다. 그 배경에는 언니와 당신만이 알고 있는 비밀이 있다.
난 정말 모르겠어, 사람들이 어떻게 통념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지, 그런 삶을 어떻게 견딜 수 있는지.
(중략)
그렇게 생각하니, 하지만 그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 않을까, 통념 뒤에 숨을 수 있어서.
- 한강, <노랑무늬영원>, '회복하는 인간' 중
성공적으로 보이는 결혼을 한 언니는 결국 출산은 하지 못하고 병에 걸려 사망하는데, 그 과정에서 당신은 복잡한 감정에 휘말린다. 언니가 친정 식구들 모르게 형부와 함께 병원으로 실려다니던 한여름, 당신은 자전거를 타는 것을 즐기며 묘한 해방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책감, 그리움, 후회, 슬픔, 그 모든 것이기도 하고 그 어떤 것도 아닌 여러 감정 속에서, 당신은 발목을 접질린다. 접질린 발목을 치료하던 중에 화상을 입고, 그것을 방치해 더 큰 상처를 입고 만다. 마치 언니 죽음에 대한 대가를 치르려는 것처럼.
수슬을 하면 이 죽은 부분을 도려내는 거겠지. 가장자리 생살에서 피가 흐르겠지.
그따위, 라고 생각하며 당신이 마른 눈을 깜빡이리라는 것을 모른다.
- 한강, <노랑무늬영원>, '회복하는 인간' 중
삶에는 죽음보다 지독한 습성이 있다. 계속된다는 것이다. 죽음은 단절이지만 삶은 지속이다. 죽음은 끝이지만 삶은 이어진다. 누구 또는 무엇이 사무치게 좋든 미치게 싫든, 현재가 행복하든 불행하든, 살아있는 이상 이 삶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삶은 죽음보다 분명히 지독한 면이 있다. 심지어는 죽을 만큼 아프더라도, 죽기 전까지는 살아야 한다. 소설 속 당신의 언니처럼. 그 전의 삶이 얼마나 화려하고 아름다웠든 간에. 그렇게 생각하면 세상 모든 기쁨과 슬픔이 덧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소설 속 당신은 이렇게 생각하기도 한다. '당신이 기쁨을 두려워한 것은 불필요한 일이었다. 당신은 기쁨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때에는,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 덧없음이 나를 끝내 일으킨다. 언젠가, 지금보다 더 어리고 젊던 시절에는 삶에 대고 부득이 이유나 목적을 찾았던 적도 있다. 되도록 자주 행복하거나 기쁜 삶을 살고 싶었다. 그것이 판타지임을 이제는 안다. 꼭 불교의 가르침이 아니라도, 경험이나 확률상 행복이나 기쁨보다 불행이나 슬픔이 더 자주, 강하게 찾아오는 것이 삶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이를 먹을수록 몸과 마음이 나날이 쇠약해지기 때문에 그 확률이 더 커진다는 것도.
그럼에도, 삶이 끝내 이어진다. 살아있는 한, 아픈 몸은 언젠가 낫는다. 나아져서 다시 삶이 이어진다.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다. 소설 속 당신의 새살이 샤프심 크기에서 굵은 연필심 크기가 되듯이. 죽기 전까지는 내내 그렇다. 살다 보면 언젠가 다치고, 아프고, 그러다 회복하고, 다시 살아가게 된다. 죽을 때까지. 그 먹먹함과 덧없음, 지독함이, 나를 어떻게든 일으키고 만다. 어쩔 수 없군, 그래도 살아버려야지, 하면서. 소설 속 당신이 마지막 장면에서 자전거를 타다 크게 넘어진 채 '제발 다시 이곳에서 몸을 일으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만, 그 기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당신은 언젠가 회복하기 때문이다. (소설은 현재와 과거, 미래 시점을 자유롭게 오가며 당신이 언젠가 반드시 회복함을 보여준다) 살아있는 한.
그래서, 책을 덮고 늦은 아침을 천천히 차려 먹었다. 며칠 널어놓고는 걷어두지 않았던 빨래도 걷어서 정리했다. 오래도록 먼지가 쌓여있던 방바닥을 닦고, 설거지를 하고, 병가를 내고 쉬는 김에 밀렸던 인터넷강의도 들었다. 그러고 나니 하루가 그럭저럭 가고 있다. 원래 병가나 연차 쓴 날은 시간이 참 빨리 가는 법. 병원에서 지어온 약 덕분인지, 오전 내내 읽은 소설 덕분인지, 통증도 그럭저럭 가라앉았다. 내 경우는 마음에 쌓인 것이 사라지면 몸의 병도 대체로 낫는 편이다. 웃기게도.
그렇게 삶이 계속되고 만다. 어찌할 도리 없이. 오늘을 살아버려서 어쩔 수 없이 내일도 살아야 할 것 같다. 먹먹하고 덧없고 지독하지만 정말 어쩔 도리가 없다. 살아있는 한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