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곁을 맴돌고 있어

변주하며 달리기

by 수란

작년 가을, 생애 두 번째 풀코스 마라톤을 완주했다. 첫 번째 마라톤의 기억이 약간의 성취감과 오랜 아쉬움이었다면, 두 번째 마라톤에서는 상당한 성취감과 무한한 감사의 기억이 남았다. 사실 첫 번째 마라톤 이후 두 번째 마라톤을 하기까지 조금 망설임이 있었다.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기 위해 필요한 훈련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고, 그 과정을 다시 겪는 것이 두렵고 성가셨다. 그럼에도 다시 도전한 건, 역시 짙은 아쉬움 때문이었다. 딱 한번만, 다시 하면 그때보단 조금 더 잘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두 번째 마라톤의 기억이 좋았던 것은 사실, 내 노력이나 능력보다도 주변의 도움과 격려, 안정적인 상황의 덕분이 컸다. 서울에서 열린 마라톤도 아닌데 그렇게 많은 지인이, 예상도 못한 지점에서 그렇게 뜨겁고 간절하게 응원해줄 줄 몰랐고, 날씨가 그렇게 알맞게 좋을 수도 없었다. 천만다행으로 심지어 기록까지 단축하며 무사히 완주를 했다. 우습게도, 첫 번째 마라톤 이후 다시는 풀코스 마라톤에 도전하지 않겠다던 다짐이 산산조각 났다. 인간은 원래 변덕스러운 동물이다.


그런데 그렇듯 뿌듯하고 행복했던 두 번째 풀코스 마라톤 완주 후, 이상하게도 런태기가 왔다. 무대에서 내려온 가수처럼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그 무렵 별 생각 없이 트레일러닝 대회에 참가했다. 북한산 둘레길을 도는 코스였다. 여름 이후 아주 오랜만에 해보는 트레일러닝, 그것도 생애 최장거리였다. 힘은 들었는데, 상쾌했다. 물마른 계곡에 핀 초록 융단 같은 이끼가, 폭신폭신 낙엽 깔린 산길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평생 서울에 살았으면서, 가을의 북한산이 그렇게 깊고 크고 아름다운 곳인 줄 마흔이 넘어서야 알았다.


그 후로 트레일러닝에 소위 '꽂혔다.' 더 많은 대회들에 나가보고 싶어졌고, 산과 좀 더 친해지고 싶었다. 사실 고소공포증이 있다. 높은 곳, 발이 바닥에 닿지 않는 곳을 상당히 무서워한다. 겁은 또 어찌나 많은지, 남들은 척척 잘 내려가는 턱이 높은 계단이나 산의 내리막 흙길에도 무척 겁을 냈다. 아주 오래 전에 하산하다 발목을 접질린 적이 있지만, 그건 아주 옛날 일이다. 그럼에도 계단을 내려갈 때나 내리막 산길을 걸을 때 유난히 겁이 많다. 그런데도 산에 가고 싶었다. 더 많은 계절의 산을 경험하고 싶었다. 더 많은 숲길을 걷고 뛰고 싶었다.


그건 아마도 그애 덕분이다. 한없이 나무를 닮았던 그애. 나는 그애와 연애를 하고 이별을 하면서, 세상의 온갖 나무를 동경하게 되었다. 세상의 모든 나무들을 보면 그애가 생각났다. 부서지는 햇빛에 반짝이는 나뭇잎, 한겨울에 엷은 눈덩이들을 인 나뭇가지, 거칠거칠한 수피, 땅바닥을 구르는 이름 모를 열매들을 보면 그애를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게 그애는 꽤 오랫동안 간직될 기억이어서, 나무들을 볼 때마다, 나무들로 꽉 찬 산등성이를 볼 때마다, 이상하게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작년 연말부터 올 초까지, 산을 많이 찾았다. 올해의 새로운 목표 중 하나가 더 많은 트레일러닝 대회에 나가보는 것이었고, 그러려면 산에 익숙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최근에 한 스포츠브랜드에서 주최하는 등산프로그램에 가입한 것도, 산에 익숙해지기 위한 방편 중 하나였다. 덕분에 작년 11월부터 올 2월까지, 우리나라 국립공원의 산 중 네 곳을 다니게 되었다. 여태까지 가본 산은 전남의 월출산, 경남의 가야산, 전북의 덕유산. 앞으로 남은 산은 충북의 월악산이다.


여러 산들을 다니며, 북한산 트레일런 대회 이후로 다시금,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좋은 산들이 많았나 감탄하게 된다. 달리기를 하면서 알게 된 지인들 중에도 등산이나 트레일러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고, 최근에 가입한 등산프로그램 덕분에 새로이 지인들이 생겨서, 그들에게 많은 도움을 받고 있다. 등산이나 트레일러닝을 할 때 어떤 준비가 필요한지(산은 특히 계절이나 날씨 같은 변수에 따라 무한한 경우의 수가 생기기 때문에 사전 준비가 철저해야 한다), 어떤 요령을 활용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을, 매일같이 배운다. 언젠가의 글에도 썼지만 사는 일은 늘 배우는 일이다. 등산이나 트레일러닝도 그렇다.


그러면서 런태기도 서서히 극복되고 있다. 달리기의 가장 매력적이고 중독적인 점은, 얼마든지 변주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고, 의지만 있다면 할 수 있고, 혼자 해도 여럿이 해도 나름의 기쁨과 즐거움이 있다. 강가나 바닷가, 도로변을 달리다가도 마음만 먹으면 공원이나 숲길로 갈 수도 있다. 아침에 맑고 서늘한 공기를 마시며 하는 달리기도, 밤에 화려한 조명들을 벗삼아 하는 달리기도 나름의 매력이 있다. 서울을 달리다 지겨우면 훌쩍 강릉이나 부산으로 갈 수도 있다. 달리기라는 행위는 무척 단순하지만, 그래서 얼마든지 색다른 도전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잦은 몸의 부상이나 이런저런 마음의 상처에도, 달리기를 그만둘 수가 없다.


나는 또 언젠가의 글에서, 내가 달리기를 짝사랑하는 것 같다고 쓴 적이 있다. 잘하고 싶은데 잘해지지 않는 스스로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 그 글을 읽은 한 지인은 내게, 실은 달리기가 나를 짝사랑하는지도 모른다고, 이제 그만 달리기의 사랑을 받아달라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늘 달리기 곁을 맴돈다. 아니, 어쩌면 달리기가 늘 내 곁을 맴도는지도 모른다. 6년 전 밤마다 동두천의 어느 자전거도로 옆 작은 길을 달리던 나는, 그 후 6년이나 더 달리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이렇게까지 달릴 줄은, 심지어 눈덮인 산길까지도 달릴 줄은.


앞으로 또 얼마나 런태기가 찾아올지도, 나는 모른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건, 그럼에도 나는 이 취미를 결코 그만둘 수 없다는 것이다. 달리기가 나의 인생을 바꾸었기 때문이다. 외롭고 슬플 때, 기쁘고 즐거울 때, 달리기가 늘 곁에 있었기 때문이다. 달리기 덕분에 많은, 좋은 인연을 만났고, 넘치도록 가득 좋은 기억을 만들었고, 평생 몰랐던 어떤 것들을, 삶의 중요한 국면들을 배웠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일단 올해 더 많은 트레일러닝 대회에 도전하기 위해 내 몸과 마음을 많이 아껴줄 예정이다. 그래야 더 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 테니까. 앞서도 말했듯 사는 일은 늘 배우는 일이다. 달리기도 그렇다. 더 많은 달리기가, 나를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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