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하지 않아도 알아요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와 한강의 <희랍어 시간>에 대한 아무말

by 수란

(글에는 해당 드라마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읽기를 원하지 않으시면 뒤로가기를 눌러주세요)


나의 아버지는 2014년 8월에 돌아가셨다. 올해로 11년이 된다. 나의 아버지는 59년 평생, 나에게 단 한번도, 입밖으로 '사랑한다'는 말을 꺼내본 적이 없다. 내가 의식이 없을 때(자고 있을 때) 내게 그런 말을 했을지는 모르나, 나는 들은 기억이 없다. 나 또한, 아버지가 의식이 있을 때 아버지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다. 우리는 서로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단 한번도 서로에게 들려주지 못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다. 그렇게 우리의 관계는 끝이 났다. 죽음이란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끝낸다.


그해 가을 이른 오후에, 서울시 성북구 어느 고등학교 앞을 지나다, 장미가 흐드러지게 핀 담을 보며, 죄악감을 느꼈던 것을, 나는 11년째 기억하고 있다. 아마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것이다, 그 죄악감은. 아버지란 사람이 돌아가셨는데, 그의 딸이, 가을날 장미가 아름답다고 느끼다니. 아버지가 세상에 없는데, 세상 모든 것들이 이렇게 고요하고 아름답다니. 우리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서로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는, 그런 부녀였다. 그럼에도, 죄악감이 분명히 있었다.


최근 들어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를 보고 있다. 아이유가 어머니와 딸의 1인 2역을 한다는 점에서는, 예전 한국영화인 <인어공주>가 생각나고, 희생적이고 속정 깊은 남성 캐릭터가 등장해 여성 캐릭터의 성장과 사랑을 돕는다는 점에서는 작가의 전작인 <동백꽃 필 무렵>이 생각난다. 1년 사계절을 인간의 전 생애에 비유하는 것은 비발디의 <사계>를 떠오르게도 하고, 제주 또는 어촌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는 <맨도롱또똣>이나 <갯마을 차차차>가 생각나기도 한다. 최근 이 드라마의 인기가 높은 이유는, 아마도 이처럼 전형적인 것들 속에서 비전형적인 것을 포착해낸 힘 때문일 것이다.


이 드라마를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나와 아버지를 생각했다. 어머니나 딸에 나를 대입한 것도 아니고, 애틋한 부부 사이에 나와 옛 연인을 대입해보지도 않았다. 정말 엉뚱하게도, 각자의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사랑한다는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는, 서로에 대해 생각했다. 사실 내게 아버지는,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아버지에게 나 또한, 썩 좋은 딸은 아니었을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 좋지 않은 부녀였다. 평생. 아버지에게는 이제 물어볼 수 없어, 아버지의 경우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내게는, 그런 기억들만이 남아있다. 우리는 서로 평생 몰랐다.


내가 아버지의 말년에 대해 기억하는 말 한 마디가 있다면, 자유롭고 싶다는 말이었다. 가족이고 뭐고 필요없고 자유롭고 싶다고. 20대의 대부분을, 아산병원과 건대병원으로, 신경정신과 약을 장기복용하는 아버지의 약을 대리처방하러 다니며 보냈던 나는, 서른이 넘어서는 이미 아버지에 대한 모든 기대가 끊어져 있던 상태였으므로, 아버지란 사람이 자식 앞에서 저런 얘길 해도 되나,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아, 아버지가 자유롭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꽃이 피고 나무가 있고 아침이면 해가 뜨고 저녁이면 해가 지듯이, 그냥, 아버지란 사람도 자유롭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게, 어쩌면 내가 아버지를 가장 잘 이해했던 순간인지도 모른다.


그런 아버지는 내게,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유산을 남겨주었다. 과장을 보태면 몇십 억의 재산보다 가치가 있었다. 적어도 내게는. '죽으면 끝'이라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 실낱같이 남아있던 자살에의 충동(다른 글들에서도 짐작할 수 있지만 나는 중증의 우울증을 앓았던 적이 있고, 현재는 그럭저럭 호전중이다), 삶의 의미 따위를 찾아헤매던 헛된 몸부림, 특정 현상이나 상태, 사건에 대한 집착이나 욕망, 그런 것들이 깡그리 사라졌다. 물론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였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가 실낱보다도 가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건 값진 깨달음이었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는 말없고 무뚝뚝한 관식이, 실은 애순을 헌신적으로 지지하고 지원해왔다는 반전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깊은 감동을 준다. 후반부가 눈물바다가 되는 이유는, 관식의 말없고 지고지순한 사랑이 애틋하고 안타까워서다. 살아서 전해지지 못했던 마음이 죽어서 전해지리라는 먹먹한 희망 때문이다. 아련한 배경과 절절한 연기가 더해져 그 감동이 더욱 진해진다. 그러나 아주 사실대로 말하자면, 그 먹먹한 희망은 사실 헛되다. 감동과 눈물에 얼음을 끼얹는 이야기지만, 내 경험에 따르면 그렇다. 죽으면 끝이다. 살아서 전하지 못한 말은 죽어서도 전해지지 못한다. 서로의 평생 동안 단 한번도 사랑한다고 말한 적 없는 부녀가 있는 것처럼.


나는 아버지를 말로 사랑한 적이 없고, 아버지 또한 나를 말로 사랑한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한 적이 없는 사람들이 되었다.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고, 몸에 남아있다 하더라도, 그 몸은 죽으면 끝이 난다. 나의 어린 시절 이후로 단 한번도 포옹해본 적 없는 사람들, 단 한번도 손 잡아본 적 없는 사람들. 나와 아버지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내가 초등학생이던 시절 이후로는 둘이 찍은 사진조차도 없다. 지금도 아버지의 유골함 안에는, 나와 동생이 젖니 빠지던 시절의 가족 사진이 딱 한장 들어있다. 나머지 사진들은 각자의 증명사진이다. 나는 요즘도 가끔 그걸 보며 쓰게 웃는다.


한강의 <희랍어 시간>은, 전에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남녀의 사랑이 시작되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서로의 생애를 각자가 더듬어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주제는 '언어'다. 이 소설 속 남성은 시력을 잃어가며 글을 읽을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가고, 여성은 목소리를 잃어가며 말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어간다. 각자의 생애에서 어떤 곡절들로 인해 말과 글을 잃고 마는 것이다. 늘 언어를 재료로 다루는 문학가가, 하필 말과 글을 잃어가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쓰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에게 상실의 경험이 주는 충격 때문이다.


한강의 단편 '노랑무늬영원'에는 그런 구절이 있다. '손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나는 이 문장들을 이렇게 바꾸고 싶어진다. '언어란 그런 것이다. 한 사람의 거의 전부다.' 실은 그렇다. 우리는 늘 언어에 둘러싸여 지낸다. 하루종일 말을 하고 글을 쓴다. 공기나 물처럼 당연해서 너무나도 인식하지 못하지만, 실은 생각조차도 언어와 이미지로 한다. 그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삶을 잃어버린다는 것과 같다. 우리는 말과 글로 인해 살아가고, 말과 글로 인해 느끼고 생각하고, 말과 글을 잃으며 죽는다. 만약 살아있더라도 말과 글을 쓰지 못한다면, 그것은 사회적으로 죽은 삶이나 다름없다.


그렇게 사회적으로 죽어가던 남녀가 사랑을 시작하게 되는 계기가, 말과 글이라는 것이 흥미롭다. 여자는 말을 하지 못하는 대신 손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써 남자에게 말을 전하고, 남자는 여자의 필담을 읽지 못하는 대신 자신의 손바닥에 닿는 여자 손가락의 촉감으로 여자의 말을 알아듣는다. 그들 사이에 놓인 진한 침묵은 표면적인 것이다. 그들은 침묵 속에서 대화를 한다. 만약 남자가 침묵 속에서 대화하는 방법을 알았다면, 첫사랑인 벵골 혼혈의 여자와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가 생을 마감하기 전까지의 나는, 과거를 후회하고 미래를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과거사는 온통 후회되는 것 투성이고, 미래는 불안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조금 달라진 게 있다면, 현재 상황에 최대한 몰두하려 한다는 것. 지금은 지금 뿐이므로, 지금 내가 누군가에게 느끼는 감정을, 지금 내어놓지 않으면 미래의 나와 누군가가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서로 끊어져 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것을 안 이후의 나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을, 최소한 쪽팔리고 부끄러워서 참지는 않게 되었다.


요즘도 방영되는지는 모르겠는데, '말하지 않아도 알아요'라는 멘트가 나오는 광고가 있었다. 한국인의 속정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나, 나는 이제 그 말을 믿지 않는다.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나는 아버지가 나를 사랑했는지 아닌지 알지 못한 채 아버지를 떠나보냈다. 아버지 또한, 내가 당신을 사랑했는지 아닌지 잘 알지 못한 채 우리를 떠났다. 설령 마음으로 알았다 하더라도, 그것이 꺼내어지지 않은 이상, 우리는 확인한 적이 없다. 서로에게 확인된 적 없는 감정들만이 공중에 떠 있다가 사라졌다. 물론 그것에 어떤 의미도 없냐 하면, 그렇진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남아있는 사실과 현실은,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었던 부녀 관계다. 잔인하게도, 삶과 죽음은 그런 식으로 모든 것을 가른다. 내가 사람들에게 편지나 엽서 쓰기를 좋아하는 이유,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그 호감과 사랑을 굳이 입밖으로 꺼내어 말하는 이유는 단 하나다. 내가 말이나 글을 꺼내놓지 못한 채 내일 죽으면, 오늘까지 좋아하고 사랑했던 사람들은, 내가 그들을 좋아하고 사랑했는지 알지 못한다. 확인된 적 없는 감정들만이 공중에 떠 있다 사라지고 만다. 끝이 나고 만다.


'내심'이라는 말을 좋아한다. 몸 안에 품은 마음을 보여주는 말이다. 몸 밖으로 빠져나오려는 마음을 드러내는 말이다. 지금도, 생각하면 마음이 따뜻해지다가 시려지는 사람이 있다. 속정이 깊은데 그걸 말이나 글로 꺼낼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몸짓이나 손짓은 달콤하고 다정한데 말이나 글은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사람이 있다. 그 애틋함이 귀엽고 안타까워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 있다. 나는 내심을 다해 그를 생각한다. 그는 내게 생각지 말라고 하지만, 그게 될 수 있었다면 진작에 그렇게 했을 것이다. 내심을 다해 어떤 사람을 생각하는 일이란, 실은 고통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너무나 찬란한 일이다. 비터스윗이라는 말의 의미를 이제는 이해한다. 살을 에는 칼날이 눈부시게 빛나는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을 안다. 그가 닫아걸어놓은 마음 문의 빗장을 함부로 열고 싶은 생각도 이제는 없다. 다만 가만히 기다릴 뿐이다. 차를 마시고, 꽃을 바라보고, 길을 걸으며. 천천히 기다리며 나의 삶을 살아갈 뿐이다. 다행히 그는 몸짓과 손짓이, 눈빛이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므로, 나를 끝내 고독하게 두지는 않을 것이다. 마음 문이 열리지 않는다면 창가에 앉아 차를 마시면 된다. 꽃을 바라보면 된다.


그래서 오늘도 그에게 읽힐지 모를 편지를 쓴다. 아주 천천히 가 닿을, 그러나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질 소원을 조그맣게 혼자 중얼거린다. 그가 잠들어있을 밤에, 나지막이. 선선하고 달콤해서 봄날의 눈송이처럼 녹아버릴 것만 같은, 애틋하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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