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문

아마도 이 마음은

by 수란

브런치에 마지막 글을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곧 거짓말쟁이에 변덕쟁이가 되었다. 그 사람에게 처음에는 아무 것도 바라는 게 없다고 했으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자꾸만 바라는 게 늘어났던 것이다. 그 사람이 내게 '편하게 해.'라고 가볍게 건넨 한 마디에, 정말 나는 그에게 마음 가는 대로 하고 있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을.


그 사람이 보고싶을 때는 보고싶다고 메시지를 보내 칭얼거리고, 약속도 정하지 않고 멋대로 아무 때나 전화를 걸어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언젠가 내게 밤마다 잠이 무척 잘 온다고 했다. 저녁마다 내가 그의 기를 쏙 빼앗아가는 모양이다. 눈을 감았다 뜨면 아침이라고. 아마도 내가 그의 좋은 수면제가 되어주나보다(?)


내가 그를 보고싶어한다고 그가 내게 바로 올 수 없다는 걸 안다. 우리는 물리적으로 꽤 멀리 떨어져 있고, 그는 무척 현실적인 사람이다. 심지어 그는,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도 않는다. 이게 나의 가장 큰 문제이자 숙제. 그의 한없이 미지근한 태도가, 어느 밤에는 나를 갑자기 울컥하게 만든다.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다가, 저녁 설거지를 하다가, 잠자리에 들었을 때 문득, 그의 미지근함을 떠올리고는 울어버린다. 그러나 그는, 설령 내가 그의 눈앞에서 울고 있더라도, 손을 내밀어 눈물을 닦아줄 사람도 아니다. 잘 알고 있다. 그는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직은.


어느 날 그에게 통보했다. 내가 싫어지거나 질리거나 귀찮아지는 날이 오면, 주저없이 너 싫다고, 질렸다고, 귀찮다고, 꺼지라고 말하라고. 그가 내게 흔히 하는 것처럼 은근슬쩍 말고. 그는 내게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자상하지만, 그 다정함과 따뜻함과 자상함이 나를 많이 좋아해서 베풀어지는 게 아님을 안다.


그는 그가 아는 거의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따뜻하고 자상할 사람이다. 그를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알았다. 그의 자연스럽고 단호한 선함을. 깃이 다려진 셔츠처럼, 잘 정리된 서랍처럼 단정한 그의 태도를.


아마도 삶을 지나오며 무수히 스쳐온 상처의 기억과 경험이 그를 단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천성이 다정한 사람이다. 단호하되 자연스럽게 이타적이다. 나는 그게 선뜻 좋았다. 처음 그가 내게, 내 기준에선 엄청난 선의를 베풀었을 때, 나는 낯선 이성이 뜻없이 주는 선의에 무척 긴장하고 불안해 했다.


그런데 그는 그런 나를 결코 불쾌해 하지 않았다. 내 그런 반응이 당연하다고 했다. 도리어 잘하고 있는 거라고까지 했다. 나중에, 그의 선의가 티없는 것임을 알고 나는 그에게 무척 미안해 했는데, 그는 내가 끝까지 무안하지 않게 대해주었다. 그게 무척 고마웠던 기억이 난다.


그 모든 흐름이 자연스러워서, 그가 어느새 무척 편안해졌다. 꼭 내 몸에 잘 맞는 옷처럼, 나를 빈틈없이 감싸는 겨울이불처럼. 정말 이상한 일이지. 나는 원래 남에게 폐 끼치는 걸 죽도록 싫어한다. 내 주변의 모두가 그걸 안다. 어떤 이들은 그런 나를 서운하게 생각하기도 했다. 너는 너무 선을 긋는다던가, 남한테 기꺼이 받는 데 익숙하지 않다던가, 나는 너랑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지나치게 예의를 차린다던가...


아마 그는 내가 주변으로부터 이런 평을 듣는다고는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또는, 내 주변 사람들은 내가 그에게 하는 걸 보고 입을 떡 벌릴지도 모른다. 나는 그에게 늘 응석을 부리기 때문이다. 혀짧은 목소리로 떼를 쓰고 칭얼거리기 때문이다. 자꾸만 치근덕거리고 궁금해 하기 때문이다. 계속 말을 걸고 목소리를 듣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가 나를, 자꾸만 이전의 나와 다른 사람으로 만든다. 매일 스스로에게 새삼스럽게 놀란다. 내게 이런 막무가내 기질이, 이런 돼먹지 않은 애교가, 이런 충동적이고 저돌적인 면이. 나이 마흔을 훌쩍 넘기고도 내가 모르는 내가 이렇게나 많다니, 정말 이상한 일이다. 내가 나를 이토록 몰랐다니. 안 지 몇달 되지도 않은 누군가가, 나도 모르는 나를 이렇게나 많이 끄집어낼 수 있다니. 고작 마음이, 이 일렁이는 마음 한 자락이, 사람을 이렇게나 바꿔놓는다니.


팟캐스트 <빨간책방>의 오프닝 멘트를 모아 책으로 엮은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책>의 제목은 그 팟캐스트의 작가인 허은실이 지은 것이다. 그의 시 구절 중 일부를 바꾼 것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원래 시 구절은 '나는, 당신에게만 열리는 문'이다. 요즘 내가 그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구절이기도 하다. 어쩐지 나는, 그에게만 기꺼이 열리는 문이 된다. 나와 비슷한 듯하면서도 영 다른, 그라는 세계를 받아들이는 것이 언제나 기껍고 신기하다.


그 덕분에 우리나라에 이렇게나 좋은 산들이 많다는 걸 알았다. 겨울산의 상고대가, 그 크기가 크든 작든 영롱하다는 걸 알았다. 그 좋은 산길을 저벅저벅 걷는 어떤 사람의 발소리가 얼마나 따뜻한지 알았다. 누군가의 건강과 안녕과 무사함을 바라는 일이 얼마나 먹먹한 기분을 가져오는지를 알았다. 예전에 그애가 나를 떠나며 했던 말이 기억난다. 그애는 나를 매순간 진심을 다해 사랑했기 때문에, 나를 떠나는 순간에 한점의 후회도 없다고 했다. 그애는 정말 끝까지, 조금 서글프지만 담담한 낯빛이었다. 이제는 그애의 마음을 조금 알 것 같다.


나는 그를 매순간, 진심으로 그리워하고 있다. 보고싶어 한다. 전력을 다해 생각한다. 이 마음을 결코 감추지 않고 스스럼없이 내보인다. 그를 좋아하는 내가 부끄럽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그가, 내가 그를 좋아하는 만큼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또는, 앞으로도 꽤 오래도록 그렇다 하더라도, 내 마음에는 후회가 없다.


그가 언젠가 정말 나를 귀찮아하거나, 질려하거나, 내게 꺼지라고 말하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기꺼이 꺼져줘야 하겠지. 나는 타인에게 폐를 끼치는 건 죽도록 싫어하니까. 만약 그렇다면 한동안 무척 슬프고 고단하긴 하겠지만, 아마도 이전까지의 내 마음에 대한 후회는 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를 매순간 진심으로 그리워했기 때문이다. 보고싶어 했기 때문이다. 전력을 다해 생각하고, 그에 대한 마음을 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그에게 작은 숙제를 하나 내주었다. 매일 3분만 내 생각을 하라고 했다. 더 오래 하면 물론 더 좋을 테지만, 적어도 매일 3분 동안은, 온전히 나만 생각하도록. 그가 숙제를 잘 하고 있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도통 그의 머릿속을 읽을 수 없다. 하긴, 내 마음의 흐름을 따라가는 것조차 버거운데, 그의 머릿속을 어떻게 짐작할 수 있을까. 다만 믿을 뿐이다. 그는 언제나 내게 선하고 다정하고 따뜻한 사람이니까. 매일 3분 정도는, 나를 위해 써줄 수 있는 사람이니까.


지금 곤히 자고 있을 그 사람에게,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인다. 나는, 당신을 위해 언제든지 문을 열어젖힐 준비가 되어있다고. 열린 문 너머로 당신에게 줄 많은, 아주 사소하고 시시콜콜한 마음들이 있다고. 당신이 원한다면 언제든지 함박눈처럼 쏟아져내릴, 따뜻한. 오늘 밤 그의 꿈속에 딱 3분만,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3분만, 내가 그려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내일 밤에는 그보다 조금 더 많이...


정말이지, 나는 변덕쟁이에 거짓말쟁이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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