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란 Jun 20. 2023

사랑을 말할 때 필요한 것들

이제야, 천천히 쓰는 편지

마음의 크기가 만난 시간에 비례한다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의 20대 후반과 30대는 온통 너였다는 거야. 너와 길을 걸으며 보았던 가로수의 푸른 잎들이 좋아서, 나는 세상의 모든 푸른 잎들을 좋아하게 되었어. 모든 푸른 나무를 사랑하게 되었어. 하늘 맑은 어느 날, 고개를 조금 더 들어 바라보면 온통 푸른 것들이야. 푸른 산, 푸른 나무... 그래서 나는 종일 너를 생각할 수 있었어. 세상의 모든 푸른 잎들을 보면 네가 떠올랐으니까.


네가 매주 내려준 커피들, 너와 다녔던 서울 구석구석의 작은 동네 카페들 덕분에, 나는 커피를 마실 때마다 너를 떠올리게 되었어. 산미가 적고 진한 커피를 여태까지 좋아하는 건, 네 덕분이야. 에티오피아, 케냐, 브라질, 콜롬비아... 지구본 어디에 붙어있는지도 모르는 나라 이름을 줄줄 말할 수 있는 건, 네가 매주 내게 준 생수병에 붙어있던 너의 손글씨 덕분이야. 세상의 모든 커피를 마실 때, 작은 동네 카페에 앉아 창가를 바라볼 때, 나는 언제나 너를 생각할 수 있었어. 


어느 가을날, 네가 좋아하던 청담동의 카페 구석 자리에서, 너는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했고, 나는 오래도록 울었지. 가슴이 미어진다는 것이 어떤 감각인지 너무나 잘 알게 되었지. 내가 몸과 마음이 너무 오래 아파서, 내가 너무 오래 망설여서, 내가 너무 게으르고 서툰 사람이어서... 너는 나의 아픔을 더 견딜 수가 없었지. 혈족보다도 다정하고 어떤 친구보다도 살뜰했던 네가, 너무 허약한 나를 너무나 오래 참았지. 내가 좀 더 건강한 사람이었다면, 좀 더 단호하고 바지런하고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네가 좀 덜 아팠을까. 그게 미안해.


고개를 들지 못하는 너를 카페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온 후부터 나는 뜨개질을 더 열심히 배웠어. 내가 네게 준 마지막 선물이 손으로 뜬 하얀 컵받침이었지. 돌아보니 너는 참 내게 많은 것들을 주었는데, 나는 네게 변변하게 준 게 없었네. 밤을 새워 뜨개질을 한 후에 출근하고, 일을 마치고 집에 와서 또 뜨개질을 했어. 서툴고 느린 손으로 겨우내 머플러와 컵받침만 잔뜩 떴어. 뜰 줄 아는 게 그것뿐이었어. 그렇게 서툴러서. 손가락들이 온통 맵고 시렸어. 손이 아파야, 마음이 아프지 않았어. 아니, 실은 뭘 해도 그냥 아팠어. 아파도 뜨지 않을 수가 없었어.


시간... 시간이란 참 대단한 것이어서, 어떻게든 흘려보내면 또 살아져. 어느 날은 퇴근하고, 네가 근무하는 곳까지 두어 시간을 택시를 타고 간 적도 있지. 네 얼굴이 보고 싶어서, 택시 안에서 네게 무작정 전화를 걸었지. 두어 시간 달려간 곳에서, 푹 익은 저녁 어스름 속에서, 너는 창백하고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 우리는 마주앉아 말없이 커피 아닌 음료를, 맛이 단지 쓴지 도통 알 수 없는 것을 마셨지. 힘들게 번 돈을 왜 자기를 보러 오는 택시비에 쓰냐고, 너는 말했지. 그 걱정이 끝까지 따뜻해서, 나는 울음을 참으며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집으로 혼자 돌아갔지.


이제는 네 목소리가, 네 새카맣던 눈이 기억나지 않는다. 네 코가 얼마나 오똑하고 오종종했는지, 네 손가락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네 손이 얼마나 부드러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너와 내 생일이 똑같고, 네 예전 핸드폰번호 뒷자리가 네 생일이었어서, 그것만은 어쩔 수 없이 기억난다. 너와 함께 걸었던 거리, 너와 함께 마셨던 커피, 너와 나누었던 무수하고 자잘하고 따뜻한 이야기들, 너의 숨소리... 그런 것들이,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다. 시간이 너를 매일매일 철저하게 지워간다. 


그래도 이것 하나는 잊지 않으며 살아갈 거야, 나는. 너와 보낸 시간들 중에 행복하지 않았던 순간은 없었다는 것. 그 순간들이 모여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것. 그래서 지금은 그때보다 조금은 더 건강해져서, 조금은 더 단호해져서, 조금은 더 바지런해져서 살고 있어. 모두 네 덕분이야. 정말 고마워. 조금 더 일찍 그럴 수 있었다면 네게 상처를 덜 줄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쉬워. 나의 가장 친한 친구를 잃어버렸다는 사실보다, 실은 내가 네게 그동안 너무 많은 아픔을, 나도 모르게 주었을까봐, 그게 아쉽고 미안해. 그리고 항상 고마워. 너를 만날 수 있었던 건, 그때 네가 내 손을 잡아주었던 건, 내 삶의 최고의 행운이었어. 나의 20대 후반과 30대가 온통 너였어서, 정말 고마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