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력 도지사 후보인 구명회(한석규 분)는 아들이 교통사고를 내 사람을 죽인 것을 알고, 오로지 이 일이 자신의 정치생명을 갉아먹지 않게 하겠다는 일념으로 사고를 수습하고 아들을 자수시킨다.
이 사고로 애지중지 키운 지체장애 아들을 잃은 유중식(설경구 분)은, 사고의 진실을 밝히고, 사고 현장에서 사라진 (아들의 아기를 품은) 며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영화 <우상>의 스토리라인을 들었을 때 처음 떠오른 건, 2012년 방영된 드라마 <추적자>였다.
교통사고와 부도덕한 뒷수습, 그 후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족과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피해자가족이 맞서게 된다는 점에서 비슷한 이야기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추적자에서 뺑소니 사고를 낸 가해자의 남편, 강동윤(김상중 분)은 무려 대권주자다. 사고를 낸 건 아내지만, 사고 수습을 위해 뺑소니보다 더 부도덕하고 파렴치한 짓들을 이어나간다는 데에서, 그리고 끝내 권력을 포기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강동윤은 구명회와 많이 닮아 보인다. 사고로 딸을 잃은 백홍석(손현주 분)은 일개 형사지만,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진실을 밝히고, 딸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죄지은 자들을 벌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를 움직이는 가장 큰 동력이 부성애라는 점에서, 백홍석도 유중식과 어느 정도 닮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우상>은 <추적자>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이야기일 거라고 기대한 건, 미스테리를 쥐고 있는 제 3의 인물, 련화(천우희)가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버지의 단순한 대결이 아니라, 세 인물이 역동적으로 엮이는 이야기가 될테니, 게다가 그 세 인물을 연기한 배우들이 보통 배우들이 아니니, 2시간을 훨씬 넘는 러닝타임이지만, 그래도 깊이 몰입해서 볼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결론적으로, 나는 영화에 몰입하는 데에 실패했다. 이유를 생각해봤다.
첫째, 대사가 잘 안 들린다.
다른 관객들의 비평과 댓글들을 봐도 이에 대한 불평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건 기술적인 문제나 연기자의 역량 부족이 아니라, 연출의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상황에 따라 불분명한 발음과 얼버무리는 말투가 더 리얼하게 보일 수도 있다. 련화의 사투리도 (좀 더 알아듣기 쉬운 다른 영화의 연변 사투리들보다) 더 진짜에 가까운 것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영화 전반적으로, 대사를 놓치고, 그 때문에 상황을 놓칠 때가 너무 많았다. 불편함과 불친절하다는 느낌을 넘어, 불쾌하다는 기분까지 들 정도였다. 이런 감독의 선택이, 적지 않은 관객들의 마음을 놓쳤을 거라 생각한다.
둘째, 모든 장면에 은유와 의미가 담겨 있는 것 같아, 피곤했다.
공들여 찍은 것은 알겠다. 때로 비주얼적인 신선함에 감탄이 나오는 장면들도 분명 있었다. 단순히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 이상으로 많은 장치들이 담겨 있고,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여지가 많은 것은, 영화의 미덕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너무 많이 담겨 있다보니, 지치고, 해석하고 싶은 의욕도 생기지 않았다. 잔인한 그림들을 전시하듯 보여주는 장면들에서는, 또 한 번 불쾌한 기분을 느끼고 말았다. 도대체 무슨 의도로 이런 엽기적이리만큼 잔인한 장면들을 자꾸 들이대는 걸까? 영화가 끝난 다음이라면 몰라도, 영화를 보는 도중에 자꾸 감독의 의도를 생각하게 되면, 몰입은 순식간에 깨져버린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내가 기대했던 '대결'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세 배우는 내내 대단한 에너지들을 뿜어대는데, 이상하게 그 에너지들이 서로 엮이지가 않는다. 마치 세 개의 러닝머신 위를, 세 배우가 각자 달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랄까. 세 인물은 처음부터 끝까지 '원래 그런 사람'인 것처럼 보인다. 구명회는 권세에 미쳤고, 유중식은 아들에 미쳤고, 련화는 살기 위해선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서로를 만나 영향을 주고 받거나 변화하는 지점이 내게는 전혀 안 보였다. 강력한 사건은 자꾸만 일어나는데, 인물들은 달리던 속도와 방향 그대로 계속 달려갈 뿐이다. 나는 (그리고 아마도 적지 않은 관객들이) 결국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다.
극장을 나오며,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관객들을 몰입시키고, 울리고 웃기고, 시원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극장을 나서게 하는 영화들이 있다.
관객을 뜨겁게 하기 보단 냉정하게 만들고, 몰입보단 관찰을 하게 하고, 불편한 마음과 생각거리를 남기는 영화들도 있다.
나는 <우상>이 전자에 속한다고 생각하고 극장에 갔다. 일부러 영화를 보기 전엔 정보를 많이 찾아보지 않기 때문에, 가끔 이렇게 기대와 전혀 다른 영화를 보게 되기도 한다.
그럼 이 영화가 후자의, 대중성보다는 작품성을 추구하는, 감동보단 해석의 재미를 주는 종류의 영화였느냐.
만약 그런 영화를 만들고 싶었던 거라면, 성공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무려 '영화란 무엇인가'까지 생각하게 만들었으니, 아무런 감흥도 없었던 영화라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영화를 넘쳐흘렀던 그 에너지들이 하나로 맺히지 못한 것이 아쉽고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