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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May 10. 2019

영화 <논픽션>, 스크린 안팎을 넘나드는 끝없는 대화

인터넷시대의 글과 문학, 사랑과 불륜, 정치와 냉소, 그 모든 것에 대한


"당신의 지적인 취향을 위한 유쾌한 토크"라니, 어째 좀 거리감 느껴지는 카피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는 카피 뽑기 참 어려웠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적인 취향은 아니지만 포스터 속 줄리엣 비노쉬의 눈빛에 끌려 선택한 영화, <논-픽션>에 대한 평을 쓴다.


출판사 편집장인 알랭과 배우 셀레나, 소설가 레오나르와 국회의원 비서관인 발레리,

두 쌍의 중년 커플과,

알랭과 함께 일하게 된 젊은 디지털 마케터 로르까지, 

다섯 인물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한국판 포스터엔 발레리의 사진이 빠져있다. 발레리가 로르보다 비중이 높은데...)


이야기라고 했지만 기승전결이 뚜렷하진 않다.

종이책에서 e-북으로 시장이 옮겨가는 것에 대비하는 알랭의 '일' 이야기를 씨줄로,

레오나르와 셀레나의 '불륜' 관계가, 둘 사이 일을 레오나르가 소설에 쓴 후 변화를 맞게 되는 이야기를 날줄로 하고, 그 틈새를 카피의 '유쾌한 토크'들로 채워나가는 것이 이 이야기의 진행방식이다. 


인물들은 러닝타임 내내 둘이서나 여럿이서,

집이나 별장, 식당이나 까페, 토론회나 라디오 공개방송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소를 넘나들며 산발적으로 토크를 이어나간다.

토크의 주제도 다양하다. 문학을 종이책이 아닌 e-북 리더기나 스마트폰으로 보는 것에 대한 우려, 블로그나 SNS에 쓰는 글들에 대한 평가, 정치인이 내세우는 진정성에 대한 냉소, 이젠 사람들에게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며 '탈진실'이라는 개념까지 가면, 조금 따라잡기 버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좀비든 히어로든 떼로 몰려다녀야 제맛인 요즘 영화들 속에서,

가만히 앉아 수다나 떠는 장면들로 채워진 영화라니, 지루해 보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의외로 지루할 틈이 없다.

편집점이 빨라서 경쾌한 느낌을 주고,

불륜 이야기 특유의 흥미로운 냄새들이 호기심을 돋우고, 

속고 속이고 속는 척하고 고백하는 척하는 배우들의 섬세한 감정연기가 좋고,

먼 나라 프랑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지러운 변화들을 지금 우리나라에서도 똑같이 느낄 수 있다는 (오디오북이나 컬러이북 같은) 데에서, 끄덕끄덕하며 볼 수 있는 공감의 재미도 있다.


특히 책을 (글을) 쓰거나 읽는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빠져들 수밖에 없는 대화들이다. 

영화관이 아니라 영화 속 라디오 공개방송의 객석에 앉아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하고, 논쟁이 격해지고 인물들의 목소리가 커질 땐 나도 끼어들어 한 마디 하고 싶은 충동이 일기도 한다. 그렇게 이 영화의 토크들은 스크린 밖으로까지 와르르 쏟아져 나온다. 감독 자신이 수다 떨고 싶은 얘기를 스크린을 통해 관객들에게 직접 던지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영화 말미에 줄리엣 비노쉬의 실명이 거론될 때엔, 시침 뚝 떼고 연기하는 배우들의 모습에 웃음이 터지고, 스크린이라는 경계가 마침내 무너져버린다. 한국판 제목 '논-픽션'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순간이다.  


프랑스판 포스터는 좀 더 발랄한 느낌. 원제는 <이중생활>이다. 


인물들은 (자신의 일과 관계된) 시대의 변화에 대해서는 위기를 느끼고 혼란스러워 하지만,

사랑이라는 감정이 얼마나 불안정하고 쉽게 변하는 것인지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듯하다.

쿨하게 이별하기도 하고, 불륜을 눈감아주고 관계를 유지하기도 한다.

겉모습으론 그럭저럭 모두 행복해 보이는 결말이지만, 각자의 마음속엔 불안이나 불만, 결핍과 공허가 남아있는 것 같다.

많이 웃었고 대체로 산뜻한 분위기의 영화였지만, 아주 개운한 마음으로 극장을 나설 순 없었던 이유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미끄러지듯 스쳐 지나가는 관계들 속에서 우린 어떻게 하면 행복해질 수, 아니, 평안을 찾을 수 있을까.

변화의 흐름에 몸을 맡기는 것도, 변화를 무시하는 것도 두려운 나는,

시대를 앞서가려는 로르 쪽 보단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나머지 네 인물에 가까운, (아니 벌써) 중년인가 보다.  

한 가지 확실한 건, 내 맘대로 되는 일은 별로 없고, 예상대로 흘러가는 일은 별로 없는 시대라는 것.

그래도 어제는 보고 싶던 영화를 봤고, 오늘은 그에 대한 짧은 글을 쓸수 있다는 것에 기뻐하자.


영화 속 수많은 농담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뜨끔했던) 셀레나의 대사로 이 글을 마친다. 


"요즘 사람들은 책이나 심지어 신문 살 돈도 없다면서, 

150만원짜리 컴퓨터(우리로 치면 스마트폰이겠지)는 잘도 사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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