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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Mar 02. 2019

[영화] <가버나움>, 무책임한 부모를 고발하다

이것은 난민영화인가 막장가족드라마인가

(영화 후반부 내용이 다소 포함되어 있는 글입니다. 스포를 원치 않으시면 영화를 보고 나서 읽어주세요.)


스치듯 이 영화의 예고편을 봤을 땐,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쏟아지고 있는 '난민 영화' 중 하나라고 생각했다.

난민을 다루는 영화는 보기가 불편할 때가 많아 망설이게 된다. 보는 사람 모두의 도덕성을 의심하고 죄책감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부모님을 고소하고 싶어요." 라는 '드라마틱'한 메인 카피에 이끌려 극장을 찾았다.


사랑스런 얼굴에, 세상 다 산 듯한 표정을 가진 열두 살 아이, 자인


주요 인물인 라힐이 불법체류자이긴 하지만 난민 문제를 전면에 내세운 영화는 아니었다.

빈민가의 삶을 적나라하게 그리고 있지만, 누군가의 표현대로 '빈민 포르노'라고 부르고 싶지는 않다.

영화는, 너무나도 비인간적인 부모 아래 태어났지만, 자신의 인간성은 잃지 않으려 고군분투하는,

한 사람의 드라마를 들려준다.


카피 그대로 자인은 부모를 고소한다.

자신을 태어나게 했기 때문이고, 엄마 뱃속의 아기를 태어나게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자인의 부모에게 아이들은 사랑하고 보호해야 할 대상이 아닌, 돈벌이의 수단이다.


영화를 보는 내내 분노를 유발시키는, 뻔뻔하기 그지 없는 자인의 부모


장남인 자인은 학교 대신 위험한 거리로 내몰렸고, 자인이 아끼던 여동생 사하르는 생리를 시작하자 마자 돈에 팔려 원치 않는 결혼을 하게 된다.

딸이 너무 이른 임신으로 죽음에 이르렀는데도 부모는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

뱃속의 아이가 딸이었으면 좋겠다는 대사에서는, 소름이 돋고 분노가 치솟았다.


이들은 먹고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었다고, 빈민가에선 다들 이렇게 산다고 항변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그 모든 말은 변명에 불과하다는 것을.

영화에 나오는 또다른 부모, 라힐은, 더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아이를 지키고, 사랑하기 때문이다.


책임감 있는 부모라도 아이를 지킬 수 없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자인의 부모의 파렴치함에 치를 떨던 관객들은, 천진난만한 아기 요나스의 미소와, 아기에게 온 마음을 다해 사랑을 퍼붓는 라힐의 포옹과 키스를 보며 잠시 마음을 내려놓고 쉬어갈 수 있지만, 그 쉼은 그리 길지 않다.

라힐은 이민국에 체포되고, 여동생의 결혼 후 집을 나와 라힐의 보호 아래 있던 자인은, 갑자기 혼자 요나스를 떠안게 돼 당황한다.


절박하고 비참한 상황들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너무 귀여운 요나스 ㅜㅜ


이 때 자인은 자신은 부모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증명한다. 자신도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 힘든 어린아이인데도, 라힐이 언제 돌아온다는 보장 같은 건 없는데도, 요나스를 떠나거나 내버려두는 대신, 지키고 돌봐준다는 선택을 함으로써.


자인은 그야말로 고군분투한다. 비정한 세상과 싸우고, 지쳐가는 자기 자신과 싸운다. 그의 싸움이 더욱 눈물겨운 것은, 자인을 연기한 배우가 극 속의 자인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아왔다는 뒷이야기 때문이다. 이 때 영화는 다큐와 픽션의 경계선을 모호하게 넘나든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유니세프의 홍보영상(굶주림에 뼈만 남은 아기가 파리를 쫓을 힘도 없이 누워있는)이 주는 불편함과 당혹감을 피해갈 수 있었던 건, 자인이 빈곤의 '피해자'가 아닌, 생존을 위해 세상에 덤비는 '투사'이기 때문이다.  


자인은 자신과 가장 가까운 세상이자 자신을 가장 짓눌렀던 세상인 부모에게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까.

그리고 라힐처럼 자신을 보호해줄 세상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속시원한 결말은 아니지만, 영화의 마지막에 자인이 미소를 지을 때 관객들이 함께 웃을 수 있는 건, 자인이 (그가 보여준 용기와 성정으로) 행복해질 수 있다는 믿음과, 그가 (세상의 모든 아이들이 그렇듯이) 행복해져야 한다는 응원을 보내는 마음에서일 것이다.


극 속의 자인도, 이제는 노르웨이에서 살며 학교도 다니고 있다는 자인 역의 배우도,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행복한 아이가 되길 빈다.




<사족 - 영화 속의 드라마>


무책임한 부모 서사는 우리 드라마에서도 자주 볼 수 있다. <가버나움>을 보면서는 특별히 한 드라마가 떠올랐는데, 요즘 인기리에 방영중인 KBS 수목드라마 <왜그래 풍상씨>가 그것이다. 저 멀리 레바논에서 온 사회고발적인 영화에서 한국의 막장가족드라마의 향기가 풍기는 것이 신기했다. (여기서 '막장가족드라마'는 비하의 표현이 아니고, 하나의 장르를 일컫는 말이다.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하는 장르다. 현실성도 개연성도 무시한 '막장' 드라마가 아니라, 주변 어딘가 하나씩은 있을 법한 '막장가족'을 그린, 그래서 욕하면서 보는 재미가 있고 시청률도 높을 수 밖에 없는 드라마!)


주인공 풍상과 남매들의 엄마 노양심은, 놀라울 만큼 자인의 엄마를 닮았다.

 

문영남 작가의 다른 드라마 속 인물들처럼, 이름이 성정을 대변하는 캐릭터, No양심


줄줄이 아이를 낳기만 하고 방치했던 노양심. 시도 때도 없이 자식들 돈을 삥 뜯어가고, 어린 딸을 술집에 팔아넘기기도 했으니, 절대 자인의 엄마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리고 <가버나움>에 우리의 작은 영웅 자인이 있다면, <왜그래 풍상씨>에는 답답하리만치 희생적인 풍상씨가 있다.


풍상씨도 엄마를 고소해 버리세요!


고등학생 때부터 엄마 대신 어린 동생들을 건사해온 풍상씨. 하지만 동생들은 대부분 (엄마를 닮았는지) 무능하고 뻔뻔하고 남탓만 하는 어른으로 자랐고, 풍상씨는 비참한 말로를 맞을 것 같은 분위기인데...


너무 비극적인 결말만은 아니기를 빈다. 풍상씨도 자인처럼 마지막엔 웃을 수 있기를.

그리고 부모에게 상처 입고 학대 받았던 모든 아이들이, 그 부모보다는 훨씬 훠어어얼씬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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