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 Jun 05. 2019

영화 <하나레이베이>, 잃었어도 잊지는 않는다면

눈부신 햇살 아래 반짝였던 그, 그녀, 그리고 우리들

자식을 잃은 부모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들이 있다. 

만드는 이도 보는 이도, 깊이를 알기 어려운 그 상처를 더듬으며, 사람 마음의 가장 어두운 곳까지 들어가보고 싶은가보다. 

내일 개봉하는 일본 영화, <하나레이 베이>의 주인공 사치도 자식을 잃었다. 열아홉 살, 이제 다 키운 아들을. 그것도 머나먼 타지에서.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안타까운 사고들이 있다. 시사회 참석 확정 메일을 받은 며칠 후에도 먼 곳에서 황망한 뉴스가 들려왔다. 우리는 거짓말 같은 일로 가족을 잃은 이들을 얼마나 이해하고, 위로할 수 있을까. 

영화 속에서 작은 단서라도 찾을 수 있길 바라는 마음으로 극장을 찾았다. 


주인공 사치는 하와이로 서핑 여행을 간 아들이 상어에 물려 숨졌다는 전화를 받고, 곧장 현지로 날아간다. 긴 비행을 했을 그녀는 조금 피곤해보이긴 하지만, 한쪽 다리가 잘린 시신을 확인하고, 시신 처리 방법을 의논하고, 재가 된 아들을 담을 유골함을 고를 때까지도 울부짖거나 쓰러지거나 작게 흐느끼는 일조차 없다. 


현지 경찰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그녀를 걱정하고 위로하지만, 영화는 사치를 섣불리 동정하지 않는다. 속마음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그녀를 그저 지켜볼 뿐이다. 처음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언젠간 무너지거나 터져버릴) 그녀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생각보다 길게 이어지는 덤덤한 분위기에 조금 지루해졌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치는 매년 아들의 기일 즈음, 사고 현장인 하나레이 해변으로 휴가를 온다. 하나뿐인 가족을 빼앗아간 바다는 가혹할 정도로 아름답다. 사치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책을 읽거나, 작은 레스토랑에서 피아노를 치거나, 10년째 찾아오다보니 익숙해진 동네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후반부의 대화에서, 이런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날들이 사치에게는 아들을 삼킨 바다를, 결국 아들의 상실을 받아들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렇게 혼자 묵묵히 버텨왔던 그녀가 10년 만에 흔들리기 시작한다. 아들 또래의 일본인 서퍼들로부터 해변에서 외다리 서퍼를 봤다는 말을 들은 사치는, 밤낮으로 그를 찾아 헤매고 다닌다. 죽은 아들의 영혼이라도 나타난 거라고 믿은 걸까. 아들을 다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누구에게도 설명하거나 호소하지 않고 집요하게 해변을 누비는 그녀의 얼굴에 슬픔보다 큰 분노가 어려 있다. 터무니없이 빼앗긴 것에 대한 분노다. 10년이 지났어도, 그녀는 빼앗겼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다.


요시다 요의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시시하거나 지루한 영화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서야 자신의 상처를, 상실을 대면할 수 있게 됐다. 잃은 것은 돌아오지 않지만, 감았던 눈을 뜨고, 외면했던 것들을 끌어안을 수 있게 됐다. 감정을 한번 터뜨렸다고 마법처럼 상처가 회복되는 건 아니다. 상처는 영영 회복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그녀는 스스로의 힘으로 어떤 전환기를 맞이하게 됐다. 그렇게 하는 데에 10년이 걸렸다. 


다시, 5년 전의 참사를 떠올린다. 고작 5년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누군가에겐 이미 지겨워져버린 그 슬픔을.

살면서 누구나 아프고 억울한 일들을 겪지만, 남의 상처는 쉽게 이해할 수도, 위로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끝없이 살펴야 한다. 사고를 담당했던 경찰의 아내가, 사치에게 아들의 흔적을 간직하라고 매년, 10년을 끈질기게 권해온 것처럼. 서로의 마음에 가 닿기를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그럴 여유가 없다면, 적어도 남의 슬픔에 대해 함부로 애도기간을 정하고, 이제 그만 끝내라고 재촉하지는 않기를. 함께 애도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비웃지는 말기를.



카메라는 하와이 해변의 눈부신 햇살을 자주, 아름답게 담아낸다. 

햇빛이 보석처럼 박힌 바다 위를 떠다니는 청춘들의 모습은 더욱 눈부시고 아름답다. 

그 사실만은, 그들이 생생히 살아있었고, 하나 하나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는 사실만은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에서 재회한 젊은 서퍼가 사치에게 말한다.

깜빡하는 건 괜찮다고. 아예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된다고. 


이제 사치는 아들의 기억과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건 그녀를 덜 외롭게 할 수도, 더 외롭게 할 수도 있다. 

그래도 그게 그녀의 선택이고, 그녀의 삶이다.

부디 덜 외로운 쪽이기를.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잃었거나 언젠가 잃게 될 우리 모두의 삶이, 서로로 인해 조금은 덜 외로워지기를 바란다.


매거진의 이전글 [영화] <가버나움>, 무책임한 부모를 고발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