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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0. 2019

4. 데뷔를 향한 긴 여정, ‘망생이’의 길

“이번 생은 망했어요”의 줄임말 아니에요

‘드라마작가 지망생(이하 지망생)’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말 중에 ‘망생이’가 있다.

활용 사례로는 “올해로 10년차 망생이입니다.” “40대 망생이도 보조작가 할 수 있나요?”  있다.


다소 경망스러워 보이기도, 허망해 보이기도 하는 어감의 이 단어에는, 공모라는 달콤한 기회와 낙선이라는 쓰디 쓴 실패가 반복되는 삶에 지친 지망생들의 불안함, 열패감, 자기비하와 자기연민이 모두 담겨 있다.     


2019년을 사는 어느 망생이의 1년을 미리 한 번 따라가 보자. 


1월, 남들은 한 해 동안의 저축 계획, 여행 계획, 결혼 계획을 세울 때, 망생이는 올해는 단막을 적어도 세 편 쓰고 새 미니 기획안에 1, 2부 대본까지 뽑아보겠다는 계획을 세우며 마음을 다잡는다. J사와 C사, 2월 말이 마감인 단막극 공모전이 두 개나 있어, 두 달은 단막을 새로 쓰거나 전에 써둔 작품을 수정하면서 보낸다. 며칠 밤을 새고 마감시간에 겨우 맞춰 응모 완료. 이번 작품으로 드디어 당선될 것 같은 느낌에 가슴이 부풀지만, 세 달 후에 있을 당선 발표까지는 이 기대감을 잊기로 한다. 이젠 5월 말 마감인 미니 공모전을 준비할 차례다.


장르물이라 취재할 시간이 빠듯하긴 하지만, 오래전부터 준비해온 아이템이라 캐릭터와 전체 줄거리는 어느 정도 잡혀있다. 세 달 동안 올인하면 완성해서 응모할 수 있다. 취재하면서 오랜만에 사람 구경도 하고, 오가는 길에 꽃구경도 한다. 청첩장의 계절이지만 마음에도 지갑에도 여유가 없어 선뜻 참석하기가 어려워진다. 드라마 쓴다더니 방송은 언제 하냐는 질문들에 답할 준비도 안 돼 있다. 커피값을 아껴 축의금만 보내고 집에 틀어박혀 대본을 쓴다.     


세 달 후. 포기하지 않고 응모했다는 것만으로도 자신을 칭찬해주고 싶다. 드라마가 끝나면 포상휴가를 가는 것처럼, 가까운 데 바람이라도 쐬러 가고 싶은데... 이런, 생활비가 똑 떨어졌다. 단막 공모에서도 똑 떨어졌다. 교육원 홈페이지에서 본 보조작가 모집에 지원해볼까, 집 근처 편의점에서 야간 알바를 할까, 고민이 시작된다. 편의점 쪽이 내 글 쓸 시간을 덜 뺏길 것 같아 이력서를 낸다. 7월엔 L사 영화 시나리오, 8월은 스토리공모대전, 10월 라디오드라마, 11월엔 다시 K사 단막극까지, 공모전은 시지프스의 바위처럼 끊임없이 굴러 내려오고, 전생에 큰 죄를 지었음에 틀림없는 이 가련한 망생이는 끝도 없이 그 바위들을 밀어 올리고 있을 것이었다...    


드라마작가 지망생만 대단히 괴롭고 고생스럽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공개적으로 모집하고 정원 초과의 지원자가 몰리는 모든 직업엔 지망생이 있다.

공무원이나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기 위해 20대를 바치는 사람들이 있고, 개그맨이나 아나운서 공채에 번번이 떨어지면서도 몇 번이고 재도전하는 이들, 10대 시절을 연습실에서 보내는 아이돌 연습생들도 있다.


데뷔를 했지만 지망생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처지인 나는, 어떤 분야의 지망생에게든 너무 강렬하게 감정이입이 돼 난감할 때가 가끔 있다.

아이돌을 선발하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면서, 지원자들의 간절함에 이입돼 나도 모르게 눈물을 줄줄 흘려 가족들을 당황하게 했다. 공무원 시험에 몇 번 낙방한 청년이 어머니와 고향으로 돌아가던 길 고속도로 휴게소 화장실에서 목을 맸다는 뉴스에는, 가까운 사람을 잃은 듯 며칠을 끙끙 앓았다. 지망생 까페에서 절망과 우울을 호소하는 익명글을 볼 때면, 위로할 단어를 쉽게 찾지 못해 오랫동안 키보드 위를 서성이기도 한다. 모든 지망생이 안쓰럽고, 대견하고, 지망생 시절이 너무 길지는 않기를 응원하게 된다.        


다니던 회사를 그만 두고 드라마 제작사의 기획작가로 일하던 때, 그러니까 지망생 1년차일 때의 일이다.

스타 연출가이기도 했던 제작사 대표가 내게 말했다. 작가 되려면 10년은 걸린다고 생각하라고. 

“아, 그렇습니까?” 소중한 조언을 들은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속으로는 살짝, 코웃음을 쳤던 것 같다. ‘내가 3년 안에 되고 만다. 두고 봐라!’    


스스로에게 약속했던 3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4년차, 5년차, 6년차, 시간이 흐를수록 불안함은 커져 갔다.


그 무렵 대학교 강의실에 앉아 있는 꿈을 반복해서 꿨다.

군대 다시 가는 꿈보다야 낫겠지만, 서른 다 된 나이에 열 살 어린 후배들과 함께 강의를 들어야 하는 상황도 썩 유쾌하진 않았다. 왜 그런 꿈을 꾸는지 당시엔 의아했는데,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같이 사회생활을 시작한 동기들은 대리도 되고, 과장도 되고, 차도 사고 집도 사고 결혼도 하는데, 나만 제자리, 아니, 퇴행하고 있는 듯해 괴로웠던 마음이 그런 꿈으로 나타났던 거다.  


7년차에 단막으로 데뷔하고 8년차에 미니 공모에 당선되면서 지망생 시절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지난 7년이 지긋지긋했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인생에서 도려내고 싶은 시절이었다.     


다시 5년이 지나, 조금은 마음에 여유를 갖고 그 시절을 돌아볼 수 있는 지금은 생각이 바뀌었다.

도려내고 싶지 않다. 7년이면 내 인생의 1할 가까이 되는 시간인데, 아까워서 그걸 어떻게 버리나.

인생에서 버려야 하는, 버려도 되는 시간은 없다고 믿는다.     


사실, 너무 힘들었던 어떤 순간들은 무의식중에 지워버렸는지, 과음하고 블랙아웃된 시간들처럼 희미하다.

지금 지망생인 여러분, 지망생의 길에 들어서려는 여러분은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망치고 싶을수록 정신 똑바로 차리고, 삶의 가장 중요한 때를 산다는 마음으로 이 시간을 통과하기를 응원한다.

지우고 싶은 시절이 되지 않기를 기도한다.

그래, 고생스러워도 평생 잊지 못할 여행을 시작하는 거라고 생각하면 어떨까.     


여러분은 장기적으로는 좋은 작가, 단기적으로는 데뷔라는 목적지를 향한 긴 여행을 떠나려 한다. 

그 목적지가 어디라고 할까... 프랑스 파리 정도가 좋겠다.     


누군가는 신이 주신 재능이라는 전세기를 타고 파리로 직행할 수도 있겠다.

대부분은 상황이 여의치 않아서, 또는 시행착오들을 겪으며, 여러 경유지들을 돌고 돌아 목적지로 간다.

어쩌다 보니 비행기보다 비용도 많이 들고 시간도 훨씬 오래 걸리는 크루즈에 올라탄 사람도 있을 거다.

교통수단은 내 맘대로 선택하기 어려워도, 여행가방은 내 의지대로 꾸릴 수 있다.

긴 여행이 될 테니 가뿐하게 배낭 하나만 챙기자.

배낭에 꼭 넣어야 할 필수 품목 몇 가지는 다음 글에 소개하려 한다.

나도 미리 알고 챙겼으면 참 좋았을 텐데, 아쉬움과 애정을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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