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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0. 2019

5. 지망생의 여행가방에 꼭 넣어야 할 것들 (1)

- 책상 앞에 앉아있을 수 있는 체력, 최소한의 생계비, 그리고...

데뷔로 가는 여행에 꼭 필요한 준비물 세 가지. 

비밀스런 루트로만 전해지는 전설의 드라마 작법서, 문지르면 파란 얼굴의 드라마 요정이 튀어나와 대본을 대신 써주는 요술 램프,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드라마 각본상을 수상할 때 입을 디올 최신상 드레스 한 벌이다... 라고 쓰고 싶지만, 내가 준비한 것들은 너무나 뻔해서 오히려 잊기 쉬운, 아주 기본적인 아이템들이다.    


첫째는 체력이다.

체대 입시 준비도 아니고 웬 체력이냐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체력은 국력이다. 아니, 필력은 체력이다.   
 

일단 일정 시간 이상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일 자체에 상당한 체력이 필요하다.

그리고 드라마작가는, 밥 먹고 화장실 가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의 대부분을 노트북 앞에 앉은 채로 보낸다.


고3 때 매일 12시간 이상을 딱딱한 학교 걸상에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건, 30대인 지금 돌아보면 ‘그 나이여서 가능했던 일’이다.

지망생 1, 2년차엔 글 쓰는 게 마냥 신나기도 했고 나이도 꽤 젊었던 지라, 한 번 노트북을 펴고 앉으면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대로 밤을 새도 끄떡없었다. 하지만 나이도 들고, 앉아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자세도 나빠지고, 운동이라곤 숟가락질 젓가락질 밖에 안 하는 날들이 이어지자, 어느 날부턴가 - 나름 인체공학적인 의자를 장만했는데도 - 앉은 지 두 시간만 지나면 허리가 아프고 집중력이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통증은 점점 심해졌고, 디스크 증상인 다리 저림까지 시작됐다. 병원을 다녀 봐도 나아지는 게 없었다.
   

이래서는 드라마를 쓸 수 없을 뿐 아니라, 큰 일 날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허리만 문제가 아니다. 24시간 넘게 게임을 하던 20대가, 허벅지에서 생긴 혈전이 폐의 동맥을 막아 사망했다는 뉴스가 남 일 같지 않다. 가끔 깜짝 놀랄 정도로 심한 두통이 오는 것도 신경 쓰인다. CT라도 찍어봐야 하나? 혹시 건강염려증인가?
   

여러분, 덮어 놓고 글만 쓰단 환자 꼴을 못 면한다!

한 시간을 앉아 있었으면 10분은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는 게 모범답안이다. 그렇게 까진 못하더라도, 가끔은 정신 차리고 자기 몸 상태를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불규칙한 식사로 위염이 생기진 않았는지, 앉아만 있어 생긴 치질을 너무 방치하고 있는 건 아닌지, 술과 담배에 너무 의존하고 있지는 않은지. 해도 들지 않고 사람도 찾지 않는 방 안에 오래 갇혀 있다간 자기도 모르게 우울증에 걸릴 가능성도 적지 않다.    


하루도 빠짐없이 조깅을 한다는 하루키처럼, 내게 맞는 운동을 찾아 하고, 내 페이스에 맞는 작업 스케줄을 짤 줄 아는 작가가 되는 것이 내 목표다. 글도 몸도 건강한 작가가 되고 싶다. 그렇게 되고 싶지 않은 지망생은 없을 거다.


물론 드라마를 쓰며 헬스보이가 되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최소한 ‘허리’ 힘은 꼭 길러야 한다.

(인내심을 갖고 집요하게 써야 한다는 면에서) 드라마는 엉덩이로 쓰는 거라고 말하는 선배들이 많은데, 엉덩이 붙이고 앉아 있는 힘이 바로 허리에서 온다. 내 경우에는 요가 비디오를 보고 따라한 게 도움이 됐다. 매일 10분씩 한두 달 투자하니 허리 통증이 줄어들었고, 하루에 몇 시간은 더 앉아있을 수 있게 됐다. 걷는 운동도 허리에 좋다고 한다.

뭐든 오늘부터 시작하길 권한다. 지루하다고 소홀해져선 안 된다.

우리는 시도 아니고 소설도 아니고 드라마를 쓰겠다고 나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40분짜리 아침드라마를 쓴다고 생각해보자. 경험상 11포인트로 A4 25장 안팎이 1회 분량이다. 일주일에 5회를 방영하니, 125장이다. (줄바꿈과 여백이 많은 형식을 감안해도) 웬만한 경장편 소설 분량은 넘는다. 일주일에 한 권씩 소설을 쓰는 셈이다. 반복되는 수정 작업까지 계산하면 작업의 양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시 쓰기가 단거리 달리기고 소설은 마라톤이라면, 드라마는 산티아고 순례길 정도 될까. 발가락 여기저기 물집이 터지고 아물고 다시 터지는 고통 정도는 감내할 체력이 있어야 한다. 중도에 포기할 순 없지 않은가.     


두 번째 준비물은 경제력이다.     

경제력은 데뷔한 뒤에야 생기는 거 아닌가, 의아할지 모르겠다.

여기서 말하는 경제력은, 3년이 될지 10년이 될지 그 이상이 될지 모를 지망생 시절을 버티기 위한 최소한의 생계비를 미리 벌어뒀거나, 글을 쓰면서 다른 일을 병행해 생계비를 벌 수 있는 계획이 서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돈을 벌지 않아도 이미 돈이 많은 지망생이 있다면, 너무 부러우니까 논외로 하겠다.)    


백미경 작가가 돈은 학원사업으로 다  벌어두고 글을 썼다는 소문은 앞선 글에서도 언급한 적 있다. 한 분야에서 그만큼 성공할 때까지의 능력과 노력에 대한 얘기는 접어두고, 일단 부럽다. 돈 걱정 없이 글만 쓸 수 있는 시간이 딱 3년만, 아니, 1년만 있었으면! 많은 지망생들의 꿈이고 로망이다. 그래서 정말, 일정 기간 쓸 생활비를 계산해보고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는 지망생들도 많다. 나 또한 그랬지만, 엄청난 계산 착오가 있었다. 지망생 까페에 퇴사를 고민하는 글이 올라오면 대부분 뜯어말리는 댓글이 달리는 건, 나처럼 뼈아픈 착각을 했던 사람들이 많기 때문일 거다.     


O년 안에 데뷔하겠다는 계획은, OO년엔 로또에 당첨되겠다는 계획만큼 지켜지기 어렵다. 퇴사만 하면 24시간 글만 쓸 수 있을 것 같지만, 그게 또 생각대로 되지 않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는 자괴감이 글 쓸 시간이 없다는 초조함보다 더 괴로울 수도 있다.


‘퇴사하고 3년 안에 데뷔한다’는 목표를, ‘3년 안에 일정 수준의 성과(공모전 당선이나 미니 집필 계약)를 낸 다음에 퇴사한다’로 바꿔보기를 조심스레 추천해 본다. ‘글쓰기에 올인하기’는 그 후에 해도 늦지 않다. 3년이라는 시간이 아까울 것 같은가? 그동안 당신은 생생한 삶의 현장에서의 수많은 경험들, 짬짬이 써서 더 귀한 습작들, 좀 더 긴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얼마 간의 돈을 얻었다.

후회를 잘 안 하는 성격이지만, 퇴사를 결심했던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나는 딱 3년만 더 회사생활을 하는 쪽을 택하겠다. 그랬어도 지금보다 데뷔가 더 늦어지진 않았을 거라 믿는다. 시간이 넘쳤던 만큼 허송세월도 길었고, 많은 기회들이 너무 빨리 찾아와 놓쳐버리기도 했다.    


예상보다 긴 지망생 시절을 보냈지만, 나는 운이 꽤 좋았던 케이스이기도 했다.


(다음 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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