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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0. 2019

6. 지망생의 여행가방에 꼭 넣어야 할 것들 (2)

당신을 묵묵히 응원해줄 단 한 사람

(전편에 이어서)


나는 지망생 시절 내내 부모님과 함께 살았고, 용돈까진 못 받아도 생활비를 드리지 않아도 될 만큼은 부모의 경제력에 의존할 수 있었다. 이건 상상 이상으로 큰 도움이 된다.

본가가 지방이라 자취하며 교육원에 다니고 글을 썼던 동기들은 월세 낼 돈이 떨어지면 방 빼서 고향으로 내려가야 할 처지였고, 부양해야 할 가족이 있는 동료들은 글 쓰는 데에만 집중하기 어려워했다.

지금 가족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면, 미안함보단 고마움을 표현하고, 데뷔해서 꼭 갚겠다는 각오로 매진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내게 필요했던 건 최소한의 품위유지비(엄마 화장대의 샘플을 노리는 대신 로드샵 화장품이라도 사서 쓰고, 청첩장은 몰라도 부고 문자를 받았을 땐 돈 걱정부터 하지 않아도 될 만큼의) 뿐이라, 퇴직금으로 꽤 오랜 시간을 버틸 수 있었다.

(이쯤에서, 적은 돈으로 생활할 수 있는 능력, 물욕이 없는 성격도 경제력의 일종이라고 말하고 싶다...)


돈이 떨어질 때마다 보조작가 제의가 들어오거나, 급여는 적지만 시간도 많이 뺏기지 않는 알바자리가 생겼다. 생각해보면 운도 운이지만, 대부분의 보조작가 모집에서 요구하는 조건(교육원 전문반 이상)을 갖추고 있었고, 나이가 좀 있어도 양해가 될 정도의 다양한 알바 경험을 갖고 있었던 덕분이기도 했다. ‘글을 쓰면서 병행할 수 있는 돈벌이’의 예다.    


수기나 에세이 등 비교적 가볍게 쓸 수 있는 타 분야 공모전 상금으로 용돈 벌이를 하는 작가도 있고, 교양이나 예능 프로그램 프리뷰, 웹툰이나 교육용 영상의 스토리작가 등 글 쓰는 부업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도 있다. 에너지를 많이 쏟지 않고도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라면 도전해 볼만한 방법이다. 하지만 내 글을 쓸 집중력이 분산될 것 같다면, 차라리 글과는 전혀 상관없는, 가능하면 몸을 쓰는 아르바이트를 택하는 편이 더 나을 수 있다.     


당장은 돈보다 글 쓸 시간이 더 아쉬울 수 있지만, 내가 너무 궁핍해지면, 내 글도 궁핍해지기 쉽다.

글만 쓰다가 경제적으로 너무 코너에 몰려 있다면, 잠깐 멈추고 재정비하는 시간을 가졌으면 한다.

다시 한 번, 덮어놓고 글만 쓰면 거지꼴을 못 면한다는 걸 잊지 말자.    


드라마작가 지망생의 여행가방에 넣어야 할 마지막 준비물은, 인력이다.

인력. 사람의 힘. 힘을 주는 사람이, 지망생에겐 꼭 필요하다.    


데뷔를 해서 드라마를 쓸 때는 여러 사람들에 둘러싸여 협업하는 일이 많지만, 지망생은 자기 자신과의 긴 싸움을 하며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다. 그러다 보면, 학창시절의 친구들이나 사회생활하며 만났던 다양한 사람들과의 교류는 자연히 조금씩 줄어든다.     


드라마를 쓴다니 멋지다, 나중에 네가 쓴 드라마가 나오면 사람들한테 자랑할 거다, 주변인들이 보내주던 관심과 응원들도 점차 멀어져간다. 공모전 마감이 얼마 안 남았다는 이유로, 작가 된다고 큰소리 쳐놓고 아직까지 데뷔 못한 자신을 무시할 거라는 자격지심으로, 사람들이 모이는 자리를 피하게 된다. 가까운 지인들은 늘 바쁘거나 예민한 당신을 배려해 여럿이 여행 갈 계획이나 경조사 소식을 전하지 않는다.


예전 친구들과 소원해진 만큼, 교육원이나 스터디에서 만난 동료 지망생들과 끈끈해졌다고 위안해 보기도 하지만... 먼저 데뷔한 동료를 진심으로 축하해주지 못해 서먹해지기도 하고, 각각 다른 작품에 보조작가로 투입되기라도 하면 몇 년 동안 얼굴 보기는커녕 안부 문자 한 번 나누기도 어렵다.


그렇게, 어느 순간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면, 덩그러니 혼자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대학 시절 각별하게 지냈던 후배가 있다.

글 쓴다고 집에만 처박혀 있는 나를 끌어내 기분전환 시켜주기도 하고, 드라마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도 내가 쓴 서툰 습작들을 읽어주기도 했다.

처음 보조작가 일을 하게 돼 1년 가까이 혼을 빼놓고 지내는 동안, 친구들은커녕 가족에게도 내가 먼저 전화한 적이 없었다. 오는 전화도 못 받거나 다음에 통화하자는 말로 급히 끊어버리기 일쑤였다.

방송이 끝난 뒤, 내팽개쳤던 친구들의 근황을 챙기는데, 그 1년 사이 후배가 부친상을 당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것도 후배의 입에서 직접.


태어나 얼굴이 그렇게 뜨거워졌던 적은 처음이었다. 자기도 경황이 없었어서 내가 안 온 줄도 몰랐다며 후배는 웃었지만, 나는 창피하게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눈물을 쏟고 말았다. 부고가 안 전해진 건지, 내가 깜빡 흘려보낸 건지는 모른다. 어떤 경우였다 해도 미안했고, 부끄러웠다. 누군 안 바쁘고, 누군 안 깜빡거리나. 한동안은 후배를 볼 때마다 너무 미안해서 어색한 기분에 불편했다.   
  

내게 소중한 사람들이 떨어져 나가는 걸 보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돈이나 체력은 조금 떨어져도 어느 정도 회복할 수 있지만, 사람은 그렇지 않다.

회복이 된다 해도, 상처가 남는 것이다.  


지금은 99%는 일에 정신이 팔려 있더라도 1%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뻗은 레이더에 에너지를 쓰려 노력한다. 사람들에게 쓰는 에너지보다, 그들에게서 받는 에너지가 더 많다고 믿고 있다.
    

원래부터 인간관계에 집착하지 않는 타입이었다고, 글에 집중할 수 있다면 혼자여도 괜찮다고 말하는 지망생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사람의 체온을 느끼지 못하는 작가가 쓰는 드라마에는 (진부한 표현이지만) 사람 냄새가, 사람의 온기가 조금은 부족하지 않을까 쓸데없는 걱정을 해본다. 앞서 다른 글에도 썼지만, 드라마는 사람 얘기고, 사람 사이의 관계에 대한 얘기다. 꼭 드라마를 잘 쓰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친구가 많지 않더라도, 당신을 이해해주고 응원해 줄 한 사람은 당신 곁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혹시, 주변에 드라마작가 지망생 친구가 있다면, 아무리 궁금하더라도 “대체 니 드라마는 언제 나오는 거야?”라는 질문만은 부디 참아줬으면 좋겠다. “넌 하고 싶은 일 하잖아.”라던가, “넌 나중에 대박 나면 돈 엄청 많이 벌 거잖아. 부럽다!” 같은 (선의로 하는) 말이 엉뚱하게도 친구에게 자괴감을 줄 수도 있다.

내가 들었던, 가장 위로와 힘이 됐던 친구의 말은, “글 쓰다 답답하면 얘기해. 예쁜 까페 발견했는데 너랑 같이 가고 싶어.”였다. 잊혀지지 않은 것 같아, 마음이 놓였었다.

지망생이란 먼 길을 훌쩍 떠난 친구를 잊지 않고 응원해주는 당신, 정말 고맙다.    




자, 세 가지 준비물을 다 챙겨 넣었다면, 배낭을 단단히 여미고 등에 둘러매자.

학교 갈 시간이다.    


다음 글에선 드라마를 공부하는 여러 방법들 중 첫 번째로, 교육원과 그룹스터디에 대해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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