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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 Jan 10. 2019

7. 함께 하는 드라마 공부 - 작가교육원과 스터디

혼자 공부하기 외롭고 막막할 때

드라마작가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퇴사 의사를 밝히기 위해 파트장에게 면담을 요청했던 날을 기억한다.

바람이 선선해지기 시작했던 9월의 어느 날이었는데, 파트장의 손에 쥔 손수건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부하 직원의 퇴사가 직속 관리자의 고과에 치명적이라는 는 걸 그 땐 잘 몰랐다.) 다음 달 말까지 근무하겠다는 내게 파트장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한 6개월만... 아니, 세 달만 더 버텨주면 안 되겠니?” 

“네, 안 돼요. 11월에 개강하는 작가교육원에 다녀야 하거든요!”    


타고난 모범생인 나는 드라마를 ‘가르쳐주는’ 곳이 있다는 것에 솔깃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때 드라마작가를 양성한다는 교육기관은 한국방송작가협회의 작가교육원(이하 교육원)과, MBC와 KBS에서 주관하는 방송아카데미 정도가 전부였다. 교육원을 선택한 이유는 방송아카데미들보다 수강료가 훨씬 쌌기 때문이다. 이 단순무식한 지망생을 보라. 다행인 건, 저렴하다고 해서 절대 허술한 곳은 아니었다는 거다.     


10여 년 전에 비하면 지금은 선택지가 훨씬 많아졌다. 신설된 크고 작은 아카데미들, 스쿨들, 문화센터들까지, 드라마를 가르친다는 모든 기관 중에 가장 대표적인 곳이 바로 이 교육원이다. 


교육원 홈페이지에는 “지금은 집필중”이라는 문구 옆으로 드라마 포스터들을 띄워 놓는다. 현재 방영되고 있는 모든 드라마의 리스트처럼 보이는 이 목록은, 실은 교육원 출신 작가들이 집필 중인 드라마들이다. ‘공모 당선 축하’ 게시글을 보면, 모든 드라마 공모전의 거의 모든 당선자가 교육원 출신이다. 교육원을 나와야 작가가 될 수 있다기보다는, 대부분의 작가와 지망생들이 한 번 쯤은 교육원을 거쳐 간다는 게 더 정확할 것 같다.     


남들 다 한다는데 나도 빠질 수 없다며 모집 일정을 알아보고 있는 당신에게, 한 가지 먼저 당부할 것이 있다.

작가교육원을 수료한다고 작가자격증 같은 게 생기는 건 아니라는 것! 

그런 바보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딨냐고? 내가 그랬다. 여기만 가면 일사천리로 작가가 될 수 있을 거란 기대로 교육원을 찾았었다. 실제로 2000년대 중반까지는 MBC 베스트극장과 KBS 드라마시티라는 양대 단막극이 아직 살아 있어서, 교육원에서 좋은 습작품이 나오면 강사의 소개를 통해 다이렉트로 데뷔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내가 교육원에 다니는 동안 서서히 단막극이 사라져갔다. 때를 잘못 맞췄다. 막차를 놓친 것이다.     


비록 부푼 기대는 뼈아프게 무너졌지만, 교육원에서 공부한 2년 동안 많은 것을 얻었다.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교육원에 대해 좀 더 소개하려 한다. 드라마가 국영수도 아닌데 학원에서 가르치고 배울 수가 있는 건가, 괜히 시간과 돈만 낭비하는 건 아닐까, 고민하는 당신에게 도움이 되길 바란다.     


교육원의 드라마과정은 기초, 연수, 전문, 창작반의 4단계로 구성된다. 단계가 올라갈수록 반의 개수와 정원이 줄어드는 피라미드 구조다. 타기관에서 드라마과정을 이수했다면 바로 연수반부터 지원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첫 단계인 기초반에 지원해야 하고, 면접에 통과해야 등록할 수 있다.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그 면접에는 “책 읽는 건 좋아하냐, 어떤 책을 좋아하냐”는 비교적 쉬운 질문도 있었고, “드라마에서 캐릭터와 구성 중에 뭐가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냐”는,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제대로 파악하기도 어려웠던 질문도 있었다. “음... 저는 캐릭터요!” 퀴즈 쇼에서 모르는 문제의 답을 찍는 심정으로, 하지만 평소 많이 생각해 본 내용이라는 듯한 표정으로 씩씩하게 답했다. 기성 작가였을 면접관은 희미한 미소를 보이더니, 더 이상의 질문은 추가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한 걸 들킨 것 같아 덜컥했다. 떨어질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합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무작정 드라마가 궁금하고, 드라마를 잘 하고 싶었던 열망이나 진지함이 뚝뚝 흘렀을 것 같고, 그걸 좋게 봐주셨던 것 같다.     


나는 운 좋게 합격했지만 탈락자도 종종 나온다고 하니, 왜 드라마작가가 되려고 하는지, 어떤 드라마를 쓰고 싶은지, 교육원에 기대하고 있는 건 무엇인지 정도는 한번쯤 생각해보고 면접장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다.   

  

기초반은 드라마라는 장르, 극본이라는 형식에 대한 이해도를 높여주는 과정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빨리 단막극을 한 편 완성해 공모전에 내보고 싶겠지만, 여기선 70분 분량의 대본을 써볼 기회가 아마 없을 거다. 내가 기초반에서 받았던 과제는, 인생을 돌아봤을 때 가장 인상적인 장면으로 딱 하나의 씬을 써보는 것과, 10분짜리 초단편 드라마의 대본을 쓰는 것이었다. A4 다섯 장도 안 되는 그 대본을 쓰고 또 고쳐 쓰며 어찌나 설레던지, 그 때의 두근거림을 생각하면 지금도 기분이 좋아진다. 유명한 작가들이나 쓰는 줄 알았던 ‘대본’이라는 글이 내 손 끝에서도 나올 수 있다는 게 너무 신기했다. 내 안에 깊숙이 숨어 있던 무언가가 알을 깨고 나온 듯한, 소중한 경험이었다.     


연수반에 진급하면 드디어 단막극 대본을 쓰게 되는데, 정해진 순서대로 대본을 올리고, 다른 수강생들은 그 대본을 읽고 와 합평하는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된다. 일종의 대형 스터디가 굴러가는 모양새다.

이 때 대부분의 수강생들이 처음으로 자기 대본에 대한 본격적인 비평을 듣게 되는데, 이 첫 경험은 큰 충격으로 남을 가능성이 높다. 초보 지망생의 대본이 완벽할 리 없으니 신랄한 지적들이 이어지고, 다들 대본 보는 눈도 아직 부족하니 분석적인 비판보단 막연한 비난들이 더 쉽게 나오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격을 이겨내면 또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다. 일단 내 대본을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고, 내 머릿속에 있는 그림과 대본에서 묘사하고 있는 그림이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물론, 맷집도 좋아진다.     


이렇게 합평을 하고 듣는 것에 조금씩 익숙해질 즈음엔, 같은 반 안에서도 소규모로 따로 모여 스터디를 하는 그룹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정해진 마감일 전에 미리 스터디를 통해 합평을 듣고, 좀 더 완성도를 높인 대본을 제출하려는 거다. 상급반에 진급하려면 남들보다 좋은 대본을 써야 하니, 마음이 맞는 구성원들을 모아 스터디를 하는 건 아주 중요한 일이다. 이 때 멤버들이 교육원 수료 후나 데뷔 후까지 길게 이어지기도 한다. 왕초보 시절을 함께 겪고, 각자 성장해나가는 모습을 보며 서로 배우고, 응원해줄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지망생 생활을 버티는 데 무엇보다 큰 힘이 되어 줄 재산이다. 


나도 연수반에서 좋은 동기들을 만나 스터디를 꾸렸고, 같이 여행을 갈 정도로 친목을 다졌었다. 철없게도 공부보단 친목에, 합평보단 뒤풀이에 더 몰두했다. 어느 순간 너무 가까워진 거리가 부담스러워졌고, 어떤 실수들과 또 어떤 상황들 때문에 한 순간에 멀어져 버렸다. 아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지만, 돌아갈 수도 돌이킬 수도 없는 시간이다.

(스터디를 한다면, 회식은 매주는 말고, 한 학기에 한 두 번만 하기를 추천한다.)


전문반에서는 처음으로 작가가 아닌 PD 선생님을 만났다. (전문반 강사는 지상파 방송사의 국장급 CP이거나, 하급반 강사들보다 다소 인지도가 높은 작가일 가능성이 높다.) 수업 방식은 연수반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연출가는 대본을 어떤 눈으로 보는지 배울 수 있는, 흔치 않은 기회였다.

수강생들이 제출하는 대본의 질도 한 단계 높아졌다. 아직은 서툰 점이 있는 작품들이었지만, 그 속의 인물들과 사건들이 나를 웃기기도 하고 울리기도 했다. 연수반 때는 경험해보지 못했던 일들이었다. 그렇게 다 같이 성장해서, 다 같이 그 다음 계단으로 올라서면 좋으련만... 같은 반의 20여 명 중 두세 명 만이 최종 단계인 창작반에 진급한다.     


당시엔 진급 결과가 우편으로 통지됐는데, 높은 경쟁률을 뚫었다는 기쁨보다는, 마지막 단계를 수료하고 나면 교육원이라는 울타리를 떠나야 한다는 불안감과 막연함에 가슴이 먹먹했던 기억이 있다.    


최종보스 단계인 창작반은 특전이 많다. 일단 수강료가 공짜다. 우등생 특별장학금인 셈이다. 공짜 수업인데, 선생님은 높은 고료, 아니, 높은 시청률과 평판을 가진 스타 작가다. 학기 초반엔 선생님의 대작가다운 아우라를 침 흘리며 동경하지만, 그렇게 좋은 드라마를 쓰면서 겪었을 작가로서의 고민들과 고충들에 조금씩 공감할 수 있게 되면서는, 먼 훗날 따라가고 싶은 소중한 이정표를 얻게 된다.


여기까지 올라온 수강생들의 대본은 완성도를 떠나 자기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고, 그렇기에 합평은 좀 더 조심스러워지고, 진지해진다. 학기 중 수강생 한 명이 공모전에 당선되기도 했다. 그 한 명도 하필 그 해에는 당선작들을 방송해 주지 않는 불운을 겪었고, 우리 열다섯 명은 미래에 대한 어떤 약속도 없이 교육원 문을 나서야 했다. 각자의 대본 한 편씩을 엮은 책 한 권만이 각자의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았다. (교육원의 졸업작품집은 주요 방송사와 제작사에 돌려지는데, 우리 기수 작품집 중 한 편이 뒤늦게나마 방송을 타게 된다. 고맙게도, 내 작품이다. 이 얘기는 뒤에 ‘드라마작가로 데뷔하는 여러 가지 길’을 다루는 글에서 더 자세히 쓰겠다.)    


수료가 두렵고 아쉬웠던 건, 교육원에 나름의 소속감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정든 가족도, 돈을 주는 회사도 아니지만, ‘요즘 뭐하냐’는 질문에 ‘교육원에 다니고 있다’고 답할 수 있는 게 고마웠다. 뭐라도 하고 있는 것 같아 안심했다. 집에서 혼자 공부했으면 만날 수 없었을 다양한 사람들을 겪었고,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선생님으로, 친구로, 일을 소개해 줄 동료로 남아주었다.     


제일 중요한 건 교육원에 다니면서 대본 쓰는 실력이 늘었느냐는 건데, 당연히 는다. 

연수반에서 창작반까지 적어도 대여섯 편의 단막극을 쓰고, 다른 수강생이 쓴 습작 수십 편을 읽고 분석하고 합평하는데, 늘기 싫어도 안 늘 수가 없다. 다른 교육기관의 수강생들도 아마 비슷한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고 있을 거라 생각한다.   


물론, 얼만큼 느느냐는 본인 하기에 달렸다. 새 대본을 써야 하는데 떠오르는 소재가 없어 예전 반에서 썼던 작품을 살짝 고쳐 낸다거나, 합평할 대본을 읽을 시간이 없어 아예 결석을 한다거나, 수업이나 스터디보다 뒤풀이 시간에 에너지를 더 많이 쏟는 사람은, 크게 발전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거다.     


직장이나 다른 사정 때문에 교육원에 다니기가 여의치 않은 당신, 이미 교육원은 수료했고 혼자 대본은 계속 쓰고 있는데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고 제자리걸음 중인 것 같은 당신은, 다음 글에서 나와 함께 또 다른 공부법들을 연구해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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