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교문 앞에서 500원 주고 병아리 한 마리를 사 왔던 기억은 있다. 손바닥 위에 올려놓으면 햇볕처럼 따뜻했던 감촉이 아직도 생생한 그 병아리는, 목이 좀 길어지나 싶을 즈음 길고양이에게 물려 죽고 말았다. 그 후론 동물을 사 오거나, 키우자고 조르지 않았다.
어른이 되고, 자취하는 친구들이 유행처럼 고양이를 키우기 시작했을 때엔, 고양이가 있으면 덜 외롭나 하고 좀 혹하긴 했다. 쳐다보고만 있어도 시간이 훌쩍 가는 고양이의 매력에 살짝 홀리기도 했다. 내 병아리를 물어 죽인 놈도 고양이였다는 걸 잊을 정도였다. (삐약아, 미안.) 그래도 키우고 싶은 마음까진 들지 않았다. 고양이보단 사람과 노는 게 좋고, 혼자 노는 건 더 좋았다.
동물을 좋아하는 사람과 결혼했다. 남편은 하루 대부분의 시간을 집에서 혼자 보내는 나를 위해 고양이든 개든 반려동물을 꼭 들여야 한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남편에게 세뇌가 됐는지 나도 언젠간 동물과 함께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됐지만, 당장은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내 몸 하나 씻기고 먹이기도 귀찮을 때가 많은데, 말 못 하는 동물이 필요로 하는 것들을 꼼꼼하게 챙겨줄 수 있을까? 내가 잘못해서 아프거나 다치면 어떡해? 어리고 예쁠 때만 귀엽다가, 늙고 병들면 거추장스러워지는 거 아냐?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들은 (언제나처럼) 난임으로 연결된다.
동물 한 마리 키울 만한 책임감이나 따뜻함도 없으면서, 아이는 잘 키울 수 있을까? 이렇게 이기적이고 삭막한 사람이어서 내게 아이가 안 오는 건가... (종종 그러듯) 말도 안 되는 삐약, 아니 비약에 빠져 있을 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고양이 좀 맡아 줄 수 있어? 한 일주일 정도만.
작년 여름, 15년 가까이 함께 했던 고양이를 하늘로 보내고, 지난 겨울 한 살 남짓한 유기묘를 구조해 새 식구로 들인 친구였다. 결혼 십 년 만에 해외여행을 가는 친구는 들떠 있었고, 고양이와 함께 하는 일주일을 그려보며 내가 더 들떠버렸다. 일주일 정도는, 괜찮을 것 같았다. 남편은... 흥분했다. 고양이가 오기 전날 밤엔 잠을 설칠 정도였다.
그런데 고양이가 아닌 다른 생명체가 왔으니..
샴 고양이가 사람을 잘 따른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세상에 이런 개냥이는 처음이었다. 낯도 안 가린다. 친구가 제 집과 화장실과 밥과 장난감만 두고 (이 이상 뭐가 필요할까 싶다만) 떠난 뒤 현관 앞에 목석처럼 앉아있던 고양이는, 10분쯤 지났을까, 슬그머니 내 무릎 위로 올라와 자세를 잡았다. 고양이가 나한테만 온다고 삐진 남편이 쇼파에 벌러덩 누워버리자, 이번엔 남편 배 위로 올라가 잠이 들어버린다. 바닥보단 높은 곳을 좋아해서기도 하겠지만, 사람의 체온이 편한가보다.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고양이 방석, 아니 고양이 집사 역할에 빠르게 적응해 갔다. 밥과 놀이, 눈꼽 떼주기는 주로 내가, 돌돌이와 화장실 청소는 남편이 맡았다. 일주일 동안 고양이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잤고, 탈출 시도도 한 번 밖에 하지 않았다. 여독도 풀지 못하고 고양이부터 데리러 온 친구는, (나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만) 고양이가 잘 지냈나보다고, 털에서 윤기가 난다고 했다.
고양이가 떠나고 다시 일주일, 아직도 문득 문득 고양이 생각이 날 때가 있다.
아침에 핸드폰 알람소리를 듣고 깰 때.
친구 집에선 침대에서 같이 잤다는 고양이를 우리는 침실에 들이지 않고 혼자 자게 했는데, 사나흘 지나자 알람소리에 이어 사람이 나온다는 걸 알고, 알람소리만 듣고도 애옹애옹 밥달라고 울기 시작해서 웃으면서 깼었다.
쇼파에서 책을 읽다 갑자기 잠이 쏟아져 잠깐 눈을 붙일 때.
여기 누워 있으면 꼭 고양이도 옆으로 올라와 앞발 하나라도 내게 살을 대고 잠이 들었었다. 잠든 고양이를 슬쩍 들어 배 위에 올려놓으면, 그대로 꿈쩍 않고 잘도 잤었지. 배가 차가운 날 핫팩을 두른 것처럼 뜨끈했는데.
하루 한 번 챙겨 먹는 분말형 영양제 봉지를 뜯을 때.
자기 간식이랑 모양도 사이즈도 비슷해서, 제 건 줄 알고 발을 모으고 앉아 눈이 반짝반짝했었는데.
외출했다 돌아왔을 때.
장본 걸 정리하고 옷 갈아입는 동안 졸졸 따라다니던 고양이. 배고픈가 하고 밥을 주면, 밥 말고 손을 달라며 배를 보이고 눕던 고양이. 한 오 분 쓰다듬어주고 나면 그제야 개운한 얼굴로 밥을 먹으러 가던 고양이.
담이 온 것 같다는 남편 어깨를 주물러줄 때.
나도 모르게 이마며 턱이며, 고양이가 좋아하던 곳을 주물러 주고 있는 나.
남편이 어딘가 숨어있던 고양이털 한 올을 발견했을 때.
재밌는 걸 찾았다는 듯 웃는 남편의 눈가가 촉촉해보인 건 기분 탓이었겠지...
역시, 고양이는 사람을 홀리는 동물이란 걸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그리고, 조금 부족하고 서툴더라도, 나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겠다는 자신감 비슷한 것이 생겼다. 누군가를, 그러니까 아기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이 조금은 사라진 것이다. 어쩌면 고양이가 나를 돌봐준 건지도 모르겠다. 고양이가 있었던 날들 내내 뱃속이 따뜻했고, 많이 웃었고, 남편에게 괜한 짜증이나 투정을 부리는 일이 한 번도 없었고, 집안 공기마저 다정하고 부드러워져 있었으니까.
쇼파에 누워 게임을 하다 그대로 잠들어버린 남편의 얼굴을 본다. 전처럼 못생겨 보이거나 한심해 보이지 않는다. 커다란 고양이 같기도 하다. 하루의 반 이상을 자는 고양이였지만 곁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한결 좋았던 것처럼, 이 사람이 뭘 하든, 어떤 모습이든, 내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 참 고맙다는 생각을 오랜만에 해본다.
머지 않아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갓난아기와 같이 키울 자신은 없으니, 아이가 서너살은 됐을 때? 올해 안에 아이가 생기지 않으면, 내년이 될 수도 있다. 당장 입양할 고양이를 알아보자는 남편에게 내 계획을 말했더니, 알겠다며 신이 났다. 일주일만에 강아지파에서 고양이파로 변절한 지조없는 남자다. 아기보다 고양이가 더 좋은 건 아니지? (아니란다.)
지금도 충분히 좋은 우리 집, 우리 두 식구지만, 더 아늑한 집, 더 많은 식구가 되는 날을 꿈꿔본다. 고양이와 함께 한 일주일이, 그날을 조금 앞당겨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