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유 Jun 11. 2019

아이 없는 전업주부의 서른아홉 번째 생일

날씨가 좋으니 다 좋으다.

생일이다.

나이가 적지 않은 난임 여성에게 생일은 반갑지만은 않은 날일 수 있다.

만 서른다섯 이후부턴 나이가 한 살 한 살 많아질 때마다 임신 성공률이 급격히 낮아지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보여줬던, 가파르게 떨어지는 그래프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난임 여성이 아니어도,

올 1년도 지난 1년처럼 잔병치레 없이 건강할 수 있을까? 그랬으면 좋겠는데.

손을 모아 보게 되는 나이다. 


마을버스로 10분 거리인 엄마 집에서 아침을 먹기로 했다. 

결혼하고 두 번인가 세 번은, 엄마가 나 낳는다고 고생한 날이니까, 하고

미역국을 끓여 부모님을 초대했었는데.

이제 '시집가고 철든 딸' 코스프레는 끝났고, 엄마가 해주는 미역국과 잡채를 얻어먹으러 간다. 

이른 시간의 외출이 익숙하지 않아 삐그덕 대는 몸으로 집을 나섰는데.

하늘이, 날씨가, 정말 더할 나위 없이 좋다. 

흐린 날은 우울해지고 비 오는 날은 온몸이 쑤시는 나로서는, 

생일날 이렇게 날씨가 좋다니 누군가로부터 아주 큰 생일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아직 들여놓지 않은 신문을 주워 들고 현관 비밀번호를 누른다. 

파자마 차림인 아빠에게 신문을 건네고, 머리 길이가 어중간했던 오빠가 드디어 머리를 묶을 수 있게 된 걸 축하해주고, 불고기를 볶는 엄마 옆에서 호박전을 부친다.

결혼 전처럼 네 가족이 아침상에 둘러앉은 순간, 뿌듯한 행복감이 온몸에 스민다. 

우리 모두 여전히 건강하고, 농담할 수 있고, 웃을 수 있고, 식탐을 부릴 수 있다.

모두가 제자리에 있다.

더 바랄 게 없는 생일날 아침이다. 


일찍 출근하느라 함께 하지 못한 사위를 위해 고기며 잡채며 바리바리 싸 둔 엄마의 선물 보따리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생일이니까 청소기 돌리는 건 하루 쉬어볼까. 빨래는 어제 미리 다 해두었다. 저녁엔 남편과 외식을 하기로 했다. 지금은 류현진 경기를 틀어놓고 이 글을 쓴다. 이 글은 내가 나에게 주는 생일선물이다. 


네이버 블로그에는 '지난 오늘'의 글을 보여주는 기능이 있다. 작년이든 몇 년 전이든 오늘 날짜에 쓴 글이 있으면 알려주고 링크를 걸어두는 것이다. 잊고 있었는데, 이 기능 때문에 2009년에 블로그를 꽤 열심히 했었다는 걸 알게 됐다. 거의 매일 길고 짧은 글들을 썼다. 2009년, 스물아홉 생일의 나는, 지상파 dmb가 되는 폰(물론 2G다)을 가족들에게 선물 받고 좋아하고 있다. 밤 10시에 끝나는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드라마를 볼 수 있게 돼 기쁘다고 한다. 10년 전의 내가 귀엽고, 귀하게 느껴진다. 


10년 후 오늘, 이 글을 보면 어떤 기분이 들까. 마흔아홉의 나도 서른아홉의 내가 귀엽게 느껴진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이 글을 보며 웃을 수 있으면 좋겠다. 그러니까 이 글은, 마흔아홉의 나를 위한 생일선물이네. 


그때도 엄마가 끓여주는 미역국을 먹을 수 있을까.

남편과 평소보다 조금 비싼 외식을 할 수 있을까.

열 살 즈음된 아이가 어설프지만 정성스레 꾸민 생일카드나, 문방구에서 산 오천 원짜리 머리핀 같은 것도 받을 수 있을까. 


카드나 선물은 안 줘도 좋으니, 신나게 노느라 땀냄새가 나는 목덜미를 내 목에 부비며

그냥 꼭 안아줬으면 좋겠어.

엄마의 생일을 축하한다고. 오래오래 살라고.

그럼 나는 최선을 다해 오래 살아보겠다.

아이의 마음속에는 더 오래 남을 인상적인 엄마가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


오늘 저녁엔 오랜만에 원피스를 꺼내 입고 화장도 살짝 해볼 생각이다.

서른 번이나 마흔 번 즈음 남았을 내 생일들 중 오늘이 가장 젊은 날이니까.

잊지 말고 향수도 뿌려야지. 선물 받은, 마음에 드는 향수가 있는데, 꼭 외출하고 나서야 '아, 향수 뿌릴 걸!' 하게 된다. 


아무래도 청소기는 돌리는 게 좋을 것 같다.

청소를 하고 나선 창문은 그대로 열어두고 바깥바람맞으며 잠깐 낮잠을 자는 것도 좋겠다.

내년엔 '아이 없는'이나 '전업주부', 두 개의 딱지 중 하나는 떨어져 있을 테니,

이렇게 한가로운 평일의 생일 낮도 앞으론 흔치 않을 거란 생각이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