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다시 시작이네요
락스를 물에 풀어 욕실 바닥을 박박 닦는다. 코를 찌르는 냄새에 눈까지 따끔거리지만 뭐 걱정할 거 없다. 쭈그린 자세로 힘을 주어 닦다 보니 배에도 힘이 들어가지만 신경쓸 거 없다. 이 내 뱃속엔 이제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난자를 채취하는 날부터 피검사로 임신 여부를 확인하는 날까지 2주 정도의 기간 동안, 나는 내 몸을 어느 때보다도 귀하게 대접해 준다. 몸에 좋은 것들을 챙겨 먹고, 그걸 차리고 치우는 수고로움은 남편에게 미룬다. 위험하거나 힘을 써야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을 만한 온갖 자잘한 일들도 모두 남편 차지다. 나는 그저 어린 고양이처럼, 하루의 절반 이상을 따뜻하고 (혹은 시원하고) 푹신한 곳에서 꾸벅꾸벅 졸며 보내면 된다.
이런 시간을 난임까페에선 '공주놀이'라고 부른다. 공주놀이라고 다 좋고 편하기만 한 건 아니다. 행여 탈이라도 날까 찬 것이나 날 것은 먹고 싶어도 참아야 하고, 날씨가 끝내주게 좋아도 어디 부딪히거나 넘어질 게 겁나 외출을 망설이게 된다. 너무 누워만 있어 몸이 찌뿌뚱해도 기지개 한 번 시원하게 켜지 못한다. 잠결에 기지개 한 번 잘못 켰다가 아랫배가 찢어지듯이 아파 깜짝 놀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재채기도 마찬가지. 기지개라니, 재채기라니! 공주님에겐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다!
"피검사 결과 수치 0.41로 비임신입니다. 생리 시작하면 3일째 방문하세요."
1분도 안 되는 간호사와의 통화를 마치며, 2주 동안 예쁘고도 무겁게 내 머리 위에 놓여 있던 공주 왕관을 슬쩍 내려놓았다. 아니, 잡아서 패대기쳤다는 표현이 맞겠다. 그런 나를 남편이 멍한 눈으로 보고 있다. 이번엔 모든 것이 너무 좋다고, 선생님이 바람을 잔뜩 넣어놨었다. 선생님이 나빴다.
이제 공주놀이는 끝났다.
더위에 지쳐 퇴근하는 남편에게 집안일까지 남겨놓을 명분이 이제는 없다. 상처 입은 난소가 아직 회복하지 못한 데다 시술 이후 심해진 생리통까지 시작돼 컨디션은 더 바닥이지만, 더는 엄살을 부릴 수가 없다. 귀하게 얻은 배아들이 내 뱃속에서 자리잡고 있을까봐 조심하고 멀리했던 모든 일을 한다. 무거운 것도 번쩍 번쩍 들고, 전자파를 실컷 맞으며 미뤄뒀던 글도 쓰고, 남편이 좋아하는 짜고 매운 찌개를 끓인다. 시녀까진 아니지만, 다시 평범한 주부로 돌아왔다. (아이 없는 전업주부도 평범한 주부로 쳐준다면 말이지만.) 혈액순환 시켜줘야 한다며 매일밤 내 다리를 주무르던 남편도, 여가시간의 대부분을 핸드폰만 들여다보며 보내던 평소의 남편으로 돌아왔다.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차분하다 못해 무거운 이 공기는 장마철이기 때문이겠지. 다시 앞으로 나아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쉽게 떼지지 않는다. 잠깐만 철퍼덕 주저앉아 있어도 될까.
끊었던 커피와 맥주, 아이스크림, 라면까지 (원수라도 진듯) 하루에 다 먹어버렸더니, 위에 탈이 나고 말았다.
아프다기보단 서러워서 조금 울었다. 아이를 품고 있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내 몸을 막 대하고 있는 나 자신에게 서운해서.
잘못한 것도 없는데 때 아닌 폭격을 맞은 위장에게 사과한다. 미안해. 내가 유치했다.
꼴도 보기 싫어 찬장 속에 처박아뒀던 영양제들을 이제 다시 꺼내놔야겠다. 다음에 욕실 청소를 할 때엔 마스크라도 끼고 해야겠고. 하지만 기왕에 사둔 맥주들은 마저 마셔야겠지. 비도 오고. 오늘은 금요일이니까.
남편과 단둘이 늦게까지 TV를 보며 늘어지게 맥주를 마시는 금요일밤이 미치게 그리워질 어느날을 상상해본다. 아이가 고맙게도 일찍 잠들어주어, 소리는 죽여놓은 TV 앞에서 남편과 속닥거리며 시시덕거릴 그 어느 날을. 당신이 이미 그런 날들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참 부럽다고, 쭉 행복하시라고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