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훈의 수필집에서, 작가가 일산 호수공원에서 엿들었다던 어느 할머니의 넋두리를 재미있게 읽었다.
요즘은 죽으면 다들 화장을 하는데, 난 화장하기 싫다고. 죽어서 냉동고에 있다가 화장까지 하면, 얼음 구덩이에 들어갔다가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건데, 그건 너무 무섭지 않냐고.
할머니의 걱정이 짠하면서도 귀엽게 느껴졌다. 내가 아직 너무 젊어서일까. 아니면 나도 태어남보다 죽음에 한 발짝 더 가까운 나이가 되어가고 있기 때문일까.
30대의 마지막 여름은 무던하게 지나갔다.
작년 여름 더위가 워낙 지독했어서 이번 더위는 짧고도 선선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여름은 여름이었고, 햇볕만큼은 어느 해보다도 뜨거웠다. 동동남향으로 큰 창이 난 우리 집 거실은 오전 내내 그 햇볕 속에 흠뻑 빠져 있었고, 손을 대면 델 것 같은 창문의 열기는 저녁이 될 때까지 식지 않았다.
건식 사우나 같은 거실 소파에 앉아 미지근한 물을 마시며 나는, 냉동 탱크에 있는 우리의 배아를 생각했다. 죽어서야 겪게 될 차디찬 온도를 태어나기도 전부터 견디고 있는 그 작고도 작은 씨앗을.
나와 남편의 몸에서 나왔지만, 우리와 다른 곳에서 이 여름을 보내고 있는 그를, 기다렸다.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얼음물도 아이스크림도 열 번 생각나면 두 번만 먹었다. 아무리 더운 여름날이어도 뱃속은 차가워질 수 있으니까. 우리의 욕심에 얼음나라로 보내졌던 너를 따뜻한 품으로 맞이하고 싶었으니까. 사진으로만 본 냉동 탱크 속 영하 196도를 상상하다 보면 더위도 짜증도 견딜만해지곤 했다.
1차에선 나오지 않았던 냉동배아가 2차에선 하나 나와 주었다. 채취 두 번에 벌써 지쳐버린 나는 주사와 채취 없이 진행할 수 있는 냉동 이식을 고대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보통은 확률을 높이기 위해 냉동배아를 한두 개 더 모아서 진행한다며 3차 채취에 들어가길 권했다. 해동 과정에서 배아가 잘못될 확률이 5프로 정도 된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확률, 확률, 난임시술은 모든 것이 확률 싸움이다. 그래도 최종 선택은 내가 해야 했고, 나는 확률이 좀 떨어지더라도 하나뿐인 냉동배아를 이식하기로 결정했다. 5프로가 잘못된다면 95프로는 해동과정을 견뎌준다는 얘기. 하나만 이식하니까 쌍둥이를 임신할 확률이 거의 없다는 점도 (지금은 아이 하나만 바라고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남편도 나도 왠지 이 한 아이가 우리에게 와 줄 것만 같은 '느낌'이 있었다.
약을 먹으며 이식을 준비했다. 주사가 없으니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웠다. 이식 당일엔 새벽부터 잠에서 깨 뒤척였다. 해동이 잘못되면 아침 일찍 전화가 온다고 하던데... 약 먹는 시간을 알리는 알람 소리에도 가슴이 철렁했다. 조금 일찍 병원에 도착해 몸도 마음도 진정시키려고 애썼다. 그리고, 긴 잠에서 무사히 깨어난 우리의 배아, '아침이'는, 아마도 얼떨떨한 기분인 채 내 뱃속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게 지난달의 일이다.
이식 후에도 컨디션이 가라앉지 않았다. 신선 때 이식 후 더 몸이 힘들었던 건 다 채취의 후유증 때문이었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피검사까지 기다리는 날짜도 이틀 짧아, 불안감이 심한 기간도 길지 않았다. 모든 것이 수월했다. 냉동이 많이 나오는 사람들에게 질투가 날 정도였다.
피검사 날 아침, 임신테스트기를 해봤다.
서른아홉 살 먹고 처음으로, 그놈의 '두 줄'을 봤다. 드라마에서, 만화에서, 심지어 난임 까페에서까지 숱하게 봤던 두 줄짜리 테스트기가 드디어, 내 손안에 있었다.
반응선(검체선)이 대조선에 비해 많이 연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처음 보는 거라 눈 앞이 환해졌다. 남편은 이 애매한 두 줄을 보고 아주 잠깐 신기해하고 신나 하는 표정이더니곧 정색하는 얼굴이 되어 "난 기대 안 할 거야. 자기도 너무 기대하지 마."를 주문처럼 반복하며 출근길에 나섰는데, 어깨는 들뜬 듯, 다리는 풀린 듯 한 그 뒷모습도 참 애매했다.
(아직도 벗어나지 못한) 마음을 내려놔야 한다는 지인들의 조언과, 좋은 쪽으로 상상하는 이미지 트레이닝이 더도움이 된다는 상담 선생님의 말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병원에 도착했다. 이제는 정말 '따끔'하기만 한 채혈을 마치고, 2차 때보다는 조심스럽지만 희망적인 뉘앙스를 팍팍 풍기는 선생님과의 진료도 마치고, 피가 멎은 주사 자국의 모양을 보며 결과를 점쳐보고(드디어 미쳐가는 건가), 근처 까페에서 300원을 추가한 디카페인 커피를 마시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책을 뒤적거린 지 한 시간 즈음 지나, 드디어 결과를 알리는 전화가 왔는데,
간호사 선생님이 말해주는 피검사 수치가 그야말로 애매하다.
... 팔.
욕의 앞글자를 생략한 게 아니고 말 그대로 8.
18도 아니고 0.8도 아닌 8.
희망은 없지만 절망도 이른 8.
어쩌면 0보다도 나쁠 수 있는 8이었다.
까페를 나와 어디로 가야 할지 잠시 방향을 잃고 서 있었다. 임신이면 바로 택시 타고 집으로 가 얌전히 누워 있고, 비임신이면 밖에서 좀 더 시간을 때우다 남편과 맛있는 거나 먹으러 (마시러) 가기로 했었는데. 약과 질정은 바로 끊고 일주일 후 다시 피검사를 받으라는 안내를 들었지만, 정확한 의미가 파악되지 않았다. 임신도 비임신도 아닌 상황인 것 같았다. 음... 일단 전철역으로 가자. 그리고 집으로 가자.
이식 후엔 일부러 찾지 않았던 난임 까페에 들어가 폭풍 검색을 시작했다. 전철에서도 마을버스에서도 제때 내리지 못할 뻔했다. 집에 와서도 검색은 계속됐다. 10 이하의 수치로 시작해 임신을 유지하고 출산한 케이스가 100명 중 한두 명은 있는 듯했다. 반면 10에서 50 사이의 수치로 시작해 다음 검사에서 수치가 떨어져 버린 안타까운 케이스는 훨씬 더 많았다. 조금이라도 희망이 있다면 며칠만이라도 더 노력해보고 싶었다.
선생님이 운영하는 까페에 질문을 올렸다.
8의 의미는 대체 뭘까요.
임신 반응이 있긴 하지만 너무 낮아서 지속될 확률은 10프로 이하라는 답이 돌아왔다. 적어도 착상이 되는 건 확인됐으니 다음 기회를 기약해 보자는 격려도.
선생님에겐 알리지 않고 약을 이틀 더 먹었다. 이틀 후 다시 테스트기를 해보고 반응선이 진해지지 않았으면 포기하기로 했다. 지속될 확률이 10프로가 아니라 1프로라고 했어도 그렇게 했을 거다.
깨끗한 한 줄을 보고 깨끗하게 포기했다.
이게, 지난 주말의 일이다.
이틀 더 약을 먹어본 건 이번 회차에서 가장 잘한 일. 애매한 미련을 남기지 않았으니까.
다른 모든 것들은, 다른 회차들과 마찬가지로, 후회 투성이다. 하지만 이제 그 후회들로 나를 길게 괴롭히진 않는다. 후회도 일상이 됐다.
일상이라고 말하고 보니 생각이 난다. 집 구경하는 걸 좋아해서 <구해줘 홈즈>라는 예능 프로를 즐겨보는데, 얼마 전 무명 배우 세 명이 함께 살 집을 구해주는 편에서 인상 깊었던 장면이 있었다. 배우 이준혁이 게스트로 나와 집 구하기에 힘을 보탰는데, 그가 후배들에게 "오디션에서 떨어지는 게 '일상'이 돼야 한다"고 말해주는 장면이었다. 어찌 보면 냉정해 보일 수도 있는 그 말이, 내겐 참 따뜻하고 애정 어린 조언으로 느껴졌다. '작가는 거절당하는 게 일'이라던 씩씩한 동료의 말도 떠오른다. '다음을 기약하자'던 선생님의 글도 다시 한번 읽어본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게 이런 말들인가 보다. 무너지고 싶지 않다. 힘을 내고 싶다. 힘이 빠졌고, 무너지고 있기 때문이다.
작년 10월에 1차 인공수정을 했으니 본격적인 시술에 들어간 지도 만으로 1년이 됐다. 1년도 넘게 걸릴 줄은 정말 몰랐다. 하지만 지난 1년 동안 가장 크게 배운 건, 사는 게 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는 거다.<기생충>의 최우식이 그 처절한 경험을 통해서도 배우지 못한 (혹은 배우고 싶지 않아 했던) 것을, 나는 비교적 적은 것을 잃으며, 그러나 마음만은 나름 처절하게, 배워가고 있다.
오랜만에 '글쓰기' 버튼을 눌렀더니, 이 짧은 글을 쓰는 데 세 시간이 걸렸다. 그래도 꾸역꾸역 써 내려간 건, 비록 우리 곁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갔지만 냉동과 해동이라는 어마어마한 일을 견뎌냈던 '아침이'에 대한 고마움과 그리움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서다.
이번 주는 10월치곤 너무더웠다. 다시 여름이 밀려오기라도 할 것처럼. 남편은 뜬금없이 빨리 눈이 왔으면 좋겠다고 말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