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마다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나 같은 경우에는 회피한다.
정면돌파는 안 하는 편이다.
그 상황 자체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며, 나의 안전한 공간으로 도망가서 쉬고 싶어 한다.
아기는 내게 두려움이었다, 아니 사실 아직도.
내가 육아에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는 단순히 몸이 고된 것 이상으로 아기가 막연한 두려움과 불편함의 결정체기 때문이다.
말이 통하지 않고, 끝없는 요구를 하며, 그걸 거역할 수도 없는 존재. 게다가 제일 무서운 건 이게 2박 3일 극기훈련이 아니고 계속 나랑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아 고생했다, 빡셌다 하고 다시 나의 안온한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여기가 나의 일상, 쉴 수 없는 여기가 일상이라는 점이 너무나 회피하고 싶은 두려운 현실이다.
8살 때 하굣길에 병아리를 한 마리 사 왔었다.
귀여운 모습으로 어린이들을 홀려서 병아리를 파는 건 정말 부적절한 일이라 생각하지만, 여하튼.
혼자 하교한 나는 병아리랑 둘이서 어째야 할지 몰랐고, 작은 상자에 넣었지만 병아리는 쉽게 날갯짓을 해서 탈출해 버렸다.
거기서 나의 멘탈은 무너지고, 귀여웠던 병아리는 어느새 괴성을 지르는 날짐승이 되어 너무 무서운 존재가 되었다. 애가 감당할 수 있는 상황을 넘어섰던 것이다.
결국 나는 거의 쓸어 담다시피 병아리를 상자에 담고 뚜껑을 닫아서 집 밖에 내놓았다. 한 시간쯤 지나서 동네 아이들이 우리 집 문을 두드리고 이 병아리 네 거냐고 했을 때, 나는 내 것 아니라고 했고, 그 아이들이 병아리를 데려간 후에야 나는 완전히 안도하고 다시 평온해질 수 있었다.
아기에게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을 때 나는 저 기억이 떠올라 괴로웠다. 결국 병아리를 책임지지 못한 것처럼 아기도 책임지지 못하는 내가 될까 봐 두려웠다. 동시에 여전히 도망가고 싶어하는 나 자신이 두려웠다.
지금도 병아리 트라우마에서 자유롭지 못하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계속 말해준다. 그때 나는 8살이었고, 지금 나는 30대 중반이다. 나는 훨씬 성장했고, 아기를 위해 많은 것들을 해줄 수 있다. 나는 아기를 지킬 수 있고, 잘 살아갈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