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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Oct 05. 2016

책상에서 경영계획 짜기

이런 이니셔티브는 절대 쓰지 말자

지금부터 내년도 혹은 중장기 경영계획을 짜 봅시다. 역량에 대한 분석이나 시장 상황에 대한 이해 없이도 단 몇 시간 안에 내년도 회사 경영계획을 얼마든지 만들 수 있습니다. 몇 가지 자료만 있다면 말이죠. 기술의 트렌드와 고객의 성향이 어떤 지 전혀 고려 없이 따라 해 보시면 됩니다. 아래 몇 가지 방법들이 있습니다. 이것대로 경영계획을 아무나 쉽게 만들 수 있습니다.


물론 제가 지금까지 한 말은 비꼬는 것임을 아실 겁니다. 요즘 한참 내년도 경영계획을 작성할 시기인데 특히 이니셔티브를 작성할 때 쓰지 말아야 할 방법들입니다. 이렇게 경영계획을 책상에서 단 몇 시간 만에 뚝딱 해치우고선 아무렇지 않게 사라지는 브랜드가 너무 많기 때문이죠. 몇 명이 모여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않는데 모여서 서로 좋아서 이니셔티브를 뚝딱 만든 다음 저녁 먹으러 가는 그런 모습 말입니다.


(주의 : 아래 내용도 반어 투성입니다)



1. 작년 이니셔티브를 그대로 쓰자 (평가해 보고 결정 하자)

올해 경영계획으로 짠 솜씨 좋은 이니셔티브가 있을 것입니다. 어차피 올해 실행이 안되었기에 내년에 한 번 더 써먹는다고 어떻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가 못한 것이니 끝까지 해보겠다는 데서 다들 끈기에 박수를 쳐 줄지 모릅니다. 시간 끌 필요 없이 이니셔티브의 KPI만 조금 맞추고 퇴사한 담당자의 이름만 최신화시키면 그럴 듯한 재활용이 됩니다. 시장의 변화나 기술의 진보, 내부 역량의 대응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맙시다. 이것을 신경 쓰면 너무 좋은 이니셔티브로 바뀔 테니까요.



2. 상위 부서의 이니셔티브를 그대로 쓰자 (우리에 맞게 쓰자)

이상하게도 하위 조직의 이니셔티브가 비슷한 회사가 있을 것입니다. 파는 물건이 다른데도 전략이라고 짠 이니셔티브의 모습이 비슷한 곳 말입니다. 샴푸와 레또르드는 분명 다른 카테고리에 있는 제품이지만 이니셔티브가 모두 생산 공정의 단축, 온라인 매출 확대, 글로벌 진출 이런 식으로 똑같을 수도 있습니다. 어차피 윗 부서에서 내년에 할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들을 고분고분히 들어야 모나게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죠. 당장 사업의 특성상 먼저 준비해야 할 게 있고 준비해야 할 컨텐츠가 다른 게 있음에도 말이죠. 그렇지만 그런 말 말고 위에서 시키는 이니셔티브로 모든 사업부가 다 똑같이 만들면 회사 오래 다닐 수 있으니까 그렇게 하는 것이죠.



3. 기계적으로 뭔가를 더한다고 하자 (아무 거나 더하지 말자)

마트에 조미료가 안 팔리는 이상한 곳이 있다고 합시다. 기본적으로 사람들이 많이 사는 조미료 구색을 어떻게 해 두었길래 안나가는지 정상적이라면 살펴보는 게 맞을 겁니다. 설탕이나 소금이 어느 회사 제품을 어느 가격에 팔아야 하는지 살펴보는 것 처럼요. 하지만 이 마트는 기본적인 조미료보다는 내년도에 수입 특수 조미료를 더 갖다 놓는 이니셔티브를 정했습니다. 맛이 여전히 트렌드이기 때문에 전문가 수준의 해외 조미료를 구해다 놓는 것이죠. 물론 맞는 말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대하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단순히 이거 안 팔리니까 저것을 더 갖다 놓자고 하니까 마트에 진열량이 늘어나니 다들 좋아한다면 정상일까요? 뭐 어떻습니까, 뚜렷한 정체성도 없는 마트인데요. 뭐든 다 갖다 놓읍시다. 그게 어떤 차별화된 상품인지는 신경쓰지 말고 후추가 안팔리면 소스를 대거 갖다 놓고 그게 뭔지 몰라도 양을 가득히 채우면 매출이 일어나지 않을까요?



4. 내용은 필요없다, 제목만 잘 보이게 구분만 명확히 하자 (지저분해도 내용만 신경쓰자)

이미 간섭만 하는 윗 부서에 수십번 퇴짜 맞았습니다. 봐도 잘 모르겠다는 거죠. 물론 실무를 모르고 시장을 모르니 쓴 말이 이해가 안될 겁니다. 이해하라고 말하느니 보고서를 깔끔하게 쓰면 빨리 넘어갈 수 있겠죠? 뭔가 생각이 정리된 거 처럼 보이는 거 말입니다. 남자와 여자, 빛과 어둠, 액체와 고체와 기체, 이렇게 말이죠. 구분만 나눕시다. 채널, 컨텐츠,, 혹은 4P 이런 식으로요. 내용은 둘째치고 이렇게 보고하면 뭔가 다 담겨져 있고 놓치는 부분이 없어 보일 수 있으니까요. 내용은 사실 허풍 덩어리지만 10 포인트 이하로 폰트를 맞춰서 어차피 보지도 않을 거니까요.



5. 유행하는 사업을 집어넣자 (정체성과 역량이 기회와 만나야 한다)

사업성 검토는 사실 만드는 사람 외에는 제대로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을 수 있습니다. 젊어지길 흉내내는 임원들 앞에서 유행하는 말을 다 갖다 붙입시다. 4차 산업 혁명에 인공지능과 사물 인식 컴퓨터에 가상 현실 기술을 이용한 이런 걸 만들겠다고 말하는 거죠. 처음에는 무슨 허황된 말을 하는가 싶다가도 이런 거 반대하면 꼰대가 되는 거 같아서 나중에는 돈을 주고 해 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행하는 사업을 넣어야 고리타분한 사업부로 찍히지 않습니다. 내용은 몰라도 드는 돈과 효익은 몰라도 그냥 넣어보십시오. 다들 뭔가 하는 줄 알 겁니다.



6. 아이디어가 없어도 되는 이니셔티브를 만들자 (어려운 용어 빼고 보고 형식도 없애자)

백주부가 방송에서 '만능 양념' 같은 것을 만들어서 소개하곤 합니다. 이니셔티브도 뭐든 넣으면 되는 만능제목이 있습니다. '어떤 시스템을 구축한다', '고객조사를 통해 뭔가 해보겠다', '프로세스를 단축시키겠다', '조직을 추리겠다', '실험식 형태로 바꾸겠다' 뭐 이런 말들입니다. 뭔지 실제 내용은 몰라도 그럴듯한 말입니다. 마치 거대한 경영 이론의 신봉자가 되어 뭔가 현실에서 해 보려는 시도 같아 보입니다. 정작 누가할지도 구체적인 아이디어도 없습니다. 하지만 귀찮은 게 많은 임원들은 그냥 넘어갑니다. 잘 해 줄거라 믿는 상호 의존적인 관계가 강해서일까요? 사업은 뜬 구름 잡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한 철 놀다 가는 철새 도래지로 곧 바뀝니다.



7. 신사업을 하자고 하자 (쓸 수 있는 돈을 보고 판단하자)

유행하고는 다릅니다. 그냥 새로운 사업을 더 하자는 겁니다. 새로운 요소를 접목하는 내용이 아닙니다. 양적으로 신 사업을 하는 것입니다. 설탕 파는 데서 후추도 팔자는 세부적인 것을 더 하는 것도 아닙니다. 시멘트 회사에서 수입차 딜러 사업을 해보자는 식입니다. 상황만 시장이 있다고 꾸미는 겁니다. 오너의 개인적인 취향이지만 맞춰 주기 위해서 보고서만 만들어서 이사회에 근거만 만들어 두는 겁니다. 물론 신사업에 들어갈 막대한 돈은 부족합니다. 빌려야 합니다. 기존 사업에서 작년 같이 돈이 벌리리라는 보장도 없지만 덜 보수적으로 현금 확보안도 잡았습니다. 이건 가능 한게 아니라 가능 해야만 하는 것이니까요.



8. 기존 사업은 수익성을 올린다고만 쓰자 (쥐어짜는 것은 선택이 필요하다)

사업이 잘 안되거나 성숙기에 접어든 것 처럼 매출이 성장을 멈출 때가 찾아 옵니다. 전가의 보도처럼 '원가 절감', '판매관리비용 절감', '인원 감축' 등의 전략적 방법들이 쏟아져 나옵니다. 윗 사람들 입에서 지나가다 한 마디씩 더 나오는 꼴이죠. 이런 회사의 윗선에서 쪼는 데 반대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아래 직원들의 생각과 다를 수 있지만요. 경영계획의 이니셔티브로 죄다 수익성을 높이는 방안이 이렇게 올라갑니다. 단기적으로 해 먹고 빠질 거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러나 떠날 준비도 함께 하지 않으면 곧 돌아오는 부메랑을 맞을 겁니다. 브랜드 파괴, 인재 유출, 영업망 철수 말이죠.



정말 경영계획의 이니셔티브를 이렇게 짜고 있는 회사가 있다면 당장 책상에서 나와서 현실을 마주하십시오. 시장에서 취향의 변화와 기술의 속도를 경험하고 무엇에 맞추어 미리 어떤 것을 준비해야 하는지 머리를 맞대야 합니다. 과거의 자료는 과거의 성쇠를 점들의 연결처럼 확인하는 데 있을 뿐입니다. 몇 년 째 반복되는 경영계획을 작성하고 발전이 없는 사업을 하고 있다면 제대로 된 이니셔티브를 고민해볼 때입니다. 이런 거 짜집기 하느라 밤을 새고 별 내용도 없으면서 파워포인트의 효과 넣으려고 주말에 출근해 본적이 있기에 그냥 이렇게 몇 자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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