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의 일이기도 재무의 일이기도 현업의 일이기도한
예산을 관리하는 행위는 일반적으로 기업에서 가장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보통 경영기획 등의 파트에서 수립하고 관리하게 되는데 기본적인 전략 부서의 아젠더에 맞게 예산이 편성되거나 재무팀의 자금 계획 등을 토대로 전년대비 얼마간의 조정을 해서 수립되는 게 보통입니다. 물론 예산을 그렇게만 짜지는 않습니다. 예산에 대한 많은 실무 이론들이 있고 실제 외부 교육으로 기업에서 필요한 지식을 충당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스킬적인 내용은 예산이 수립되는 일련의 거버넌스를 뛰어넘지는 못합니다.
예산에 대한 가장 큰 오해는 전년대비 실적에 따른 증감입니다. 전략이 없는,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없는 기업 외에는 하지 말아야 할 운영방법이지만 많은 기업들이 여러 이유에서 이 방법으로 예산을 계획합니다. 예산 그 자체가 기업이 추구하는 바를 보여주는 것이고 이것은 필연적으로 프로세스의 변화에 맞추어 갈 수 밖에 없지만 예산이 수립되는 과정은 이를 뒷받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예산 관련 부서가 다른 부서대비 힘이 없어서 입김에 휘둘리는대로 예산 로직이 마련되거나 아니면 아무도 중요성에 대해 인식하는 사람이 없어서 그냥 하던대로 해도 다들 그냥 참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더 애매하게 예산 수립을 만드는 것으로는 계획의 수립 시기가 예산 수립 시기보다 뒤에 있는 기업입니다. 예산 계획을 어렵게 작성했지만 기업이 추구하는 전략과 투자하는 목적이 달라지면 이전에 했던 예산 수립 작업은 의미없는 일이 되어 버립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 부서의 노력에 대해 아는 사람이 많이 없는 관계 및 관행으로 이런 비효율이 지속되고 있는 기업이 있습니다. 계획이 수시로 바뀌는 것도 문제이지만 계획과 예산의 선후관계를 부서간 조율이나 이를 총괄하는 경영지원조직의 관리자가 의식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입니다.
그럼 관행을 넘어서 예산을 수립하는 게 전사적인 병목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을 따르는 게 좋을까요?
기획과 정리의 차이는 스스로 문제를 정의하고 분석을 통해 대안을 마련하느냐 아니면 불러주는 대로 쓰거나 다른 부서의 선행 작업에 의해 대부분 영향을 받는가의 차이 정도가 있습니다. 예산 수립 부서가 스스로 하위 부서의 계획을 단순히 취합을 받는 데 그치거나 전략 등의 선행 작업을 하는 부서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면 정리를 벗어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예산을 기획하는 부서는 이전 예산의 수립과 사용 과정, 사용 이후의 실적을 평가하여 어떤 경우의 예산 사용이 적중해서 효과를 낳았는지 자기만의 관점으로 주장하고 경영자와 씨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산과 관련된 부서는 모두 비슷하게는 알고 있지만 주부서가 아니며 완전히 같은 지식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산은 전략이나 기획 파트와 달리 재무적인 이해가 필요하고 재무와는 달리 전략과 경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한 복잡한 성격의 지식이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두 부서에 비해 힘이 없다면(경영자의 의지가 없거나 누군가가 쫒겨나듯이 가는 부서라면) 이 부서는 스스로 그 편견을 딛고 올라올 필요가 있습니다. 예산의 주기나 예산 수립 시 투자와 비용을 각 부분별로 얼마나 할당해야 하는지는 예산 부서만의 노하우에 달려 있습니다. 모든 이해 관계가 여기 얽혀 있지만 제대로 매듭을 풀고 묶을 부서는 예산 부서 외에는 없기 때문입니다.
성장이 멈춘 기업의 쇠락이 가속화 되는데는 위기 상황에서 예산을 어디에 써야 하는지 철학이 없어서인 경우가 많습니다. 연구비에 대한 투자를 위기 상황에서도 꾸준히 한 기업과 그렇지 않은 기업은 나중에 극복하는 방법과 이후 체질에도 많은 차이를 보입니다. 글로벌 기업 중에서 하나의 주력상품의 판매가 부진할 때 연구개발에 꾸준히 예산을 써서 다음 모델로 극복한 기업과 광고비를 추가 편성하고 할인 정책으로 정면돌파하려는 기업은 사후에 같은 실적을 재무적으로 거두었다고 해도 이후 전략의 방향성과 내재된 역량, 시장에서 고객이 인식하는 방법 자체가 달라집니다. 이같이 예산이 제 때 어디에다 편성되어야 하는가는 매우 전략적인 문제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산은 경영계획 상 의례적인 행위로 간주하고 엑셀에서 전년 자료를 나열하고 거기 단순한 수식으로 매겨지는 비전문적인 방법으로 수립되는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는 자원과 예상 실적과 연계되지도 않는 예산 계획을 수립하고 한 달만 지나도 아무도 보지 않을 숫자로 시스템에 남겨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예산 부서의 컨트롤타워가 단순히 예산 수립 양식을 뿌리고 취합받는 수준, 기준만 덩그러니 내려주는 수준의 기업에서 벌어질 수 밖에 없는 일입니다. 자신의 역할을 그렇게 정의한 백오피스가 프런트에 어떤 영향을 주는 지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예산 부서가 기획적인 부분과 재무적인 부분 모두 갖고 있으므로 두 부서의 영향을 받게 되지만 반대로 두 부서의 흐름을 제어하는 역할도 할 수 있습니다. 기업마다 예산 수립을 하는 부서가 기획 쪽에 있는 회사가 있고 재무 쪽에 있는 곳이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겪어 보았습니다. 기획 쪽에 있는 회사는 사업의 구조와 현장의 프로세스에 대해 잘 알고 이에 맞게 예산 편성의 방법이나 전략을 반영하지만 재무적인 자원을 고려하는데 다소 부족하고 시뮬레이션이 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조금 하다보면 이렇게 해서는 회사 운영과 괴리가 생기는 것을 재무적으로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유연하고 업무 위주의 효율적 사용이 가능합니다. 반대로 재무라인에서 예산의 전체적인 실권을 쥐고 있다면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합니다. 보통 재무적으로 특히 현금 창출이 원활하지 못한 회사가 선택하는 방법입니다. 단점은 예산 사용에 대한 비지니스적인 분석이 떨어지고 데이터와 로직의 정합성에 초점을 맞추는 일이 벌어집니다. 현업의 프로세스 변화에 적응하는 속도가 떨어집니다. 장단이 각각의 운영 방법에 있지만 중요한 점은 어떤 경우라도 그 모든 것의 컨트롤타워가 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예산 편성을 하는 부서가 현업에 대한 이해와 재무적인 이해 둘 다 떨어지거나 커뮤니케이션이 잘 되지 않으면 정말 엑셀에 숫자 채우는 것을 취합하는 부서가 되어 버리고 자금의 상황이나 실적의 추이에 따른 유연한 역할을 할 수 없게 됩니다.
예산을 수립한 이후 관리 역할은 매우 단조롭습니다. 단순히 예산을 계획 하에 썼느냐를 감사하는 데 대부분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 단조로운 역할이 어떤 기업에서는 실무와 마찰을 일으키기도 하고 작은 사업의 기회들을 날려버리는 역할도 합니다. 물론 계획은 지키라고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를 물리적인 검토 이상의 시각으로 볼 눈도 갖고 있어야 합니다. 실적이 나오지 않아 재무 계획이 틀어지는 기업에서는 보통 예산을 줄이는 식의 통제로 숫자를 맞추어 가려고 합니다. 예산 관리를 하는 부서는 예산 사용을 시스템에서 잠궈버리거나 추궁하는 식으로 운영합니다. 예산에 대한 사용 검토와 추가 승인이 제대로 이뤄져야 하는 시기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리는 요식 행위로 끝나는 경우가 많습니다. 단순히 대세인 부서에 대해서는 큰 소리 없이 추가 예산이 지급되거나 기존 제한을 풀어버리고 대세가 아니라는 이유로 새로운 기회를 제안하는 부서는 더 사업이 줄어드는 상황을 맞습니다. 물론 이를 악용해서 서로 회사 내 정치를 통해 예산을 지급받는 경우도 많습니다. 예산 부서가 너무 큰 힘을 갖고 모든 것을 부서 혼자만의 힘으로 통제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드시 다른 부서와 함께 모여 이 부분을 논의하고 '이름값'에 의한 예산 관리를 지양해야 합니다.
생각해보면 예산 문제는 국가적인 이슈입니다. 쪽지 예산부터 급하게 통과되거나 불필요하게 계류 중인 경우까지 늘 잡음이 끊이질 않습니다. 돈 문제이기 때문에 그럴 수 있고 철학이 다른 정치 집단끼리 있는 경우에는 그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기업에서는 보통 단일한 철학으로 비지니스가 운영됩니다. 사업성을 검토할 때 가치에 대한 평가에 이견이 있을 수는 있지만 가짜를 만들어서는 안됩니다. 하지만 제 목소리를 못내고 밀어붙이는 임원의 취향을 맞추기 위한 변질은 기업을 갉아먹는 대표적인 적폐입니다. 예산 부서의 모두가 이 문제를 만들고 유지할 수도, 바꿀 수도 있습니다. 물론 예산 부서를 대하는 인근 부서들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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