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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하 Oct 03. 2022

버번 체리

대리만족

체리를 떠올릴  검붉은 진홍(眞紅) 색을 연상한다. 대부분 수입산이다. 국내산 체리를 검색해보았을 , 후르츠 칵테일에 들어있는 체리처럼 옅은 앵두 같은 색의 체리가 눈에 띄었다. 상상에서 벗어난 이질감은 달콤함보다 시고 옅은 맛을  연상케 했다.  이질감에 주문 버튼멈추었다.

나는 알코올 중독이 심했다. 하루도 빠짐없이 맥주를 5리터 이상 마셔 재꼈으니, 백번 양보해도 객관적 알코올 중독이 틀림없었다. 2021년 11월 2일 단주(斷酒)를 시작했다. 금주(禁酒)가 아닌 단주라고 칭한 것은 인생의 선택지에서 술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술의 유혹보다 선명한 사고의 발전이 더욱 유혹적이었다. 단주하지 못한 다른 멀티버스 속의 나는 여전히 삐걱대고 있겠지.

눈을 가려도 초췌하구나.

딱히 알코올의 유혹을 다른 중독으로 채워나가지는 않지만, 유튜브를 보며 대리 만족하곤 한다. 영상 속의 액체(?)들은 대부분 아는 맛일 테니 적당히 상상한다. 그중 다양한 양주를 리뷰해주시는 ‘남자의 취미’님 콘텐츠를 한동안 소비하였다.

술을 즐기시지만 진행은 물 흐르는 듯 하다.

마라스키노 체리. 마라스키노 리큐르를 사용하여 만든 체리당(糖) 조림으로 맨해튼 등의 칵테일에 쓰이는 식품이다. 오리지널 레시피와 구하기 힘든 마라스키노 리큐르가 아닌, 버번을 이용한 버번 체리 레시피 콘텐츠를 시청한 후 한동안 머릿속에 맴돌았다. 하지만 난 술을 끊었는걸? 아무리 당조림이라도 알코올 함량이 높을 것이 틀림없었다.

룩사르도 마라스키노 체리 (출처 : a couple cooks)

인스타그램 브랜드 계정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 무언가 참신한 것이 필요했다. 용두사미로 끝나는 일을 극단적으로 꺼리지만, 흔히 계획단계에서는 지속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지르지 않던가? 인스타용 사진 몇 장 찍고자 호기롭게 버번 체리 레시피에 도전했다. 레시피도 공유하고(물론 출처는 밝히고), 레고 셰프(chef)도 같이 촬영해서 놓으면 개성 있고 이쁘지 않을까? 완성품은?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지 뭐.

와일드 터키 버번위스키는 8년 산임에도 5만 원을 훌쩍 넘었다. 타트체리 2만 원, 시나몬 스틱 7천 원, 넛맥 파우더 8천 원, 비정제 설탕, 히비스커스, 사진 하나 찍자고 얼마를 쓰는 거지… 버번 체리 받을 분들은 좋겠군. 인스타그램 하려고 이렇게 일을 벌인 것은 아무도 모르겠지만.

와일드터키 8년산

일일이 체리의 씨앗을 제거하였다. 매실이나 대추의 씨를 제거하는 기구가 있다길래 온 동네 마트를 뒤졌지만 비슷한 것도 찾을 수 없었다. 이렇게 시간낭비를 할 줄 알았다면 진즉에 온라인 주문을 했겠지… 나는 갑작스러운 실행 중간엔 반푼이 성향이 보인다. 하는 수 없이 텀블러의 빨대로 일일이 씨앗을 제거하였다.

파편이 날아가고 새빨간 즙이 사방에 튀었다. 오 검붉은 과육인데 즙은 생각보다 선명한 빨간색이네? 아니 감탄할 때가 아니지. 다행히 이 공정을 제외하곤 어렵지 않았다. 비율만 맞추어 끓인 후 열탕 소독한 병에 넣으면 되었다. 그렇게 230ml짜리 14병의 버번 체리가 완성됐다. 1주일 정도 보관을 거친 후 여자 친구, 어머님, 회사 동료에게 나누어주었다. 호불호가 갈리는 반응이었다. 시나몬과 팔각, 타트체리가 어우러진 느껴지는 이국적인 향. 40도가 넘는 강렬한 와일드 터키의 맛. 쓴맛과 달콤함이 함께 느껴지는 어른의 맛. 의외로 술을 멀리하시는 어머님께서 무척 좋아하셨다. 선물용으로 절반을 챙겨가셨을 정도이니.

평생 내가 맛볼 수 없는 맛이다. 그렇다고 버번 체리를 좀 더 빨리 알았더라면 하는 후회 같은 것은 없다. 그들의 시식평을 집요하게 물어 대리 만족하는 삶은 지난 삶보다 몇 배는 길어질 예정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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