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로애락
맛있어서 기쁘고 가격에 놀라고 색에 반하고 알아감에 즐겁다. 언제나 집에 쌓여 귀한 줄 몰랐던 고춧가루.
국산을 당연히 여기고, 중국산을 쓰는 업소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단가라도 알면 부끄러운 무지에서 벗어나건만 그러한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해남에서 고추가 익었다는 연락을 받았다. 유광 에나멜에 버금갈 정도로 빛이 나는 홍고추. 올해는 비가 많아 흉년이 잦았다는데 그래도 꽤 많이 건졌다는 연락을 받고 안도하였다.
소비자의 눈높이가 상향 평준화되었다. 식품이든, 전자기기든 어지간해선 구매유도가 쉽지 않다. 상세페이지는 사진을 넘어 영상과 움짤이라 불리는 gif는 필수이다. 서울에서 산지인 해남으로 가는 정도의 발품은 이제 당연한 것이 되었다. 하지만 역시 가는 날이 장날인가 익산을 지날 때까지만 해도 윈도 XP 배경화면 마냥 멋진 하늘이 회색빛이 돌더니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내일 날씨가 좋으면 1박을 해서라도 자료를 남겨야 했지만, 일기예보는 내일도 포세이돈의 자식이었다.
창업 초기에는 별 일을 다 한다고 들었다. 나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10년에 한 번 갈까 말까 한 관공서를 분기별로 들락거리고, 전문 포토그래퍼처럼 제품 사진을 수천 장 찍어내고 디자인을 하며 문구를 작성한다. 전공이었든 아니었든 상관없다. 그냥 해야 한다. 무조건 해야 한다. 봐줄 사람도 없다. 안 한다고 눈치 줄 사람도 없다. 게으름도 나의 몫이다. 날씨보단 시간을 더 귀하기에 비가 와도 촬영은 진행해야 했다.
다행히 선명한 진홍색은 회색빛 하늘을 아랑곳하지 않고 시선을 사로잡았다. 약간의 보정만 거치면 사용하는데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적어도 아마추어인 나의 눈에는. 고추를 말리는 작업을 촬영하기 위해 하우스로 이동하였다. 고춧가루 하면 온전히 햇빛에 의지한 태양초(太陽椒) 아닌가. 나의 짧은 견식으로는 태양초와 기계의 힘을 빌린 화건초(火乾草)는 품질의 차이가 극명한 것으로 알고 있었다. 색이 선명하고 단맛이 일품인 태양초, 푸른빛이 돌고 쓴맛이 나는 화건초. 하지만 가보니 화건초가 아닌가? 아니 정확히 말하면 반태양초라는 것이 정확했다.
가정에서 사용하는 고추는 태양초로 만들어도 문제가 없다. 양이 적을뿐더러 판매용이 아니므로 안심하고 집 옥상이든 마루든 시간을 들여 말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판매용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태양초를 고집하면 열심히 농사지은 홍고추를 전부 망칠 수가 있다. 때문에 1차로 반 화건초를 만든 후, 덕장으로 이동하여 태양초로 마무리한다. 남의 사정도 모르고 짧은 견식으로 이해한 나는 부끄러웠다. 답은 현장에 있다. 경험이 재산임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제분을 위해 방앗간으로 이동했다. 우리가 판매하는 고춧가루는 네이버 상위에 노출된 하얀 방균복을 입고 철분제거 공정까지 있는 마치 실험실을 방불케 하는 공장이 없다. 그저 어머님 한분이 옛 방식으로 운영하시는 재래식 방앗간이다. 꼭지와 씨를 일일이 제거한 후 제분기에 넣는다. 2차로 절구에 찧어서 마무리한다. 살균도 철분제거 공정은 없다. 이대로 출하한다. 상향 평준화된 소비자를 만족시키기 위해서 나는 나만의 공정을 추가해야 할까? 재래식 생산이 공장식 생산을 뛰어넘을 안건은 무엇이 있을까?
브랜딩에 답이 있다고 하지만 이 고민은 죽을 때까지 끝나지 않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