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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02. 2015

가을의 시간

비가 내리고 있다. 어제까지 여름은 나를 보내기 싫다고 바닥에 누워 쨍쨍하게 생떼를 부렸다. 비를 몰고 온 가을은 그 말괄량이를 달래기 위해 겨울로부터 나를 찾아온, 여름의 언니다. 사랑이 고픈 소녀를 능숙하게 달래는 현숙한 여인, 나는 이미 그녀가 여름과 겨울을 위해 많은 시간을 양보해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 아이를 어쩌나 싶던 차에 도착한 가을은 얇고 고운 손으로 여름의 눈물을 닦아 준다.
서러움이 가시지 않아 흐끅거리고 있는 소녀를 잠시 바라봤다. 시도 때도 없이 놀아달라 달려와서는 누워있는 내 팔을 꼬집고 바짓단을 당기며 낑낑대던 귀여운 아이. 때로는 지나치게 성가셔 미워할 뻔도 했지만 어쩐지 입을 앙다문 채 뾰로통한 그 표정을 보고 있자면 웃음이 나왔다. 다음에 볼 땐 제 멋대로인 성격이 조금이라도 누그러져있길. 울음을 그친 여름은 하루라도 빨리 나를 만나겠다며 봄에게로 쪼르륵 되돌아갔다. 아마 이젠 봄의 골치가 아플 것이다.
여름과 함께 걸을 땐 여름의 조그만 손을 잡아주곤 했지만 이 고고한 여인에게는 말도 섣불리 걸지 못하겠다. 스무 번도 넘은 동행이지만 언제나 가을이 어려웠다. 그녀가 감내하고 있는 것을 알기에 더욱 그랬다. 이를테면, 가을에겐 우리에게서 긍정을 걷어내는 힘이 있었다. 긍정이란 때로는 마음을 가리기 위한 가면이 되지 않나. 그러니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마음의 민낯을 보게 하는 힘이었다.
낙엽을 보면 알 수 있다. 찬 기운에 녹색이 줄어들어 그 안에 가려져 있던 갈색과 노란색이 드러난 것이 단풍, 그것을 나무 스스로 떨궈낸 것이 낙엽이니. 그러니 낙엽이란 가을에 의해 가면을 잃어버린 나무가 오히려 민낯을 견디지 못해 스스로 폐기해 버린, 나무의 속마음이었다. 하지만 가면을 벗은 모습이 유례없이 아름다웠다는 사실을 나무는 알았을까. 나무는 자신을 수치스럽게 만든 가을을 욕했지만 그녀는 말없이 버려진 잎사귀들을 추스를 뿐이었다. 나는 그런 가을이 측은해져 가을에게 괜찮으냐고 물었다. 그럼 가을은 괜찮다고 말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가을의 괜찮다는 말엔 항상 '그럼에도'가 생략되어 있었다. 그렇게 말하는 가을의 쓸쓸한 미소를 나는 봄에도 그리곤 했다.
쓸쓸함. 그것은 가을이 알려준 말이었다. 나는 가을과 처음 동행했을 때 가을이 내쉬었던 쓸쓸한 한숨을 잊지 못한다. 그녀의 습하고 차가운 바람을 들이키면 내 마음 또한 습하고 차가워졌다. 그럴 때면 내가 가을을 닮아가는 것 같아 좋았다. 가을의 숨을 가을과 작별한 후에도 간직하고 싶었던 나는 겨울로부터 그 숨을 지켜냈고, 결국 봄에도 한숨을 쉴 수 있었다. 쓸쓸히 내뱉는 숨. 그저 쓸쓸해하는 것으로 가을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을 뿐이다. 쓸쓸해하면 가을이 알아 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내가 가을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나와 가을은 말없이 걷는다. 언제나 그랬다. 가을은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었다. 침묵을 못 견뎌하는 쪽은 언제나 내 쪽이었다. 처음엔 가을의 목소리를 들으려 이런 저런 말을 건넸지만 가을은 대부분의 내 말을 미소로 받았다. 그 미소는 마치 “당신은요?”하는 것 같아 나는 그 질문의 대상을 나에게로 돌려 나에 대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늘어 놓곤 했다. 가을의 필명은 거울이 아닐까 상상했던 적이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건넬수록 보이는 건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괜찮다. 그녀가 내 옆에서 나와 걷고 있다. 가을은 자신을 겨울로의 안내자라고 여길지 모르겠지만, 나는 가을을 위해 겨울을 견딘다. 그녀의 쓸쓸함을 이해하기 위해 나는 봄에도 한숨을 쉰다. 여름이 우는 소리가 가을이 오는 소리 같아 나는 그 소리가 싫지 않다. 가을은 서정이 부슬거리는 계절, 나는 가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그녀가, 가을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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