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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24. 2015

10. 새벽에 관하여

새벽에 관하여

이름의 꺼풀을 모두 벗고
내가 가장 작아지는 시간
나를 부르던 것들은 잠에 들었다
읊조릴 이름도 없어진 나는
시간의 야외로 나와
발자국에 깃드는 실바람을 관조한다

일말의 스침도 없는 지금은
어떤 흔들림도 춤사위가 된다
그러다 홀로 됨을 못 견뎌
조약돌을 주워 호수에 던지면
작게 이는 언어의 파문
그 일렁이는 소리를 듣는 것은
목소리를  겨워할 줄 아는 탓이다

나체가 남세스러운 건
시선을 상정하기 때문이다
나는 눈을 감고 흙길을 걷고 있다
감아야 보이는 것을 생각하며,
해가 가린 달이 고고하듯
당신이 가린 내 마음이 고요하다

글을 쓴다고 하면 책상에 앉아 고뇌에 찬 표정을 하고 한 줄 한 줄 힘겹게 써 나갈 것 같지만, 나의 경우 침대에 눕긴 누웠는데 자는 법을 까먹어서 잡생각을 하다 보면 글감이 떠오를 때가 많다. 그럼 그냥 몸만 뒤집어서 폰을 켜고 메모장 어플에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긴 글을 그렇게 쓰긴 힘들고 보통 글감 정리나 짧은 시를 쓸 때 그렇게 쓰곤 한다. 그러니까 꽤 많은 글을 자기 직전, 새벽이 돼서야 쓰곤 한 것이다. 나는 왜 낮에 글을 쓰지 못하고 새벽의 힘을 빌려 글을 쓰는 걸까. 궁금했다기 보단 새벽 감성에 대한 변명을 하고 싶었다.

새벽은 나에게 뜻깊은 시간이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평일 야간으로 2년, 주말 야간으로 1년 정도 했는데 그땐 새벽이 남들의 낮과 같은 시간이었다. 새벽에 활발히 움직였고, 새벽에 글을 쓰고, 새벽에 책을 읽었다. 그러다가 비타민이 부족해졌는지 몸에 무리가 와서 그만 두었다. 여담이지만 6개월 정도가 지나고 나는 다시 그 편의점으로 돌아가 주말 오후 시간대에 일하고 있다.

나에게 새벽이 어떤 시간이냐 하면 그 누구에게도 내 이름이 불리지 않을, 오롯한 나의 시간이라고 말하고 싶다. 나를 부르는 이름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들이 가리키는 것은 나 하나다. 나는 그 이름들을 겹겹이 입고 있는 셈이다. 새벽은 그 이름의 꺼풀들을 벗을 수 있는 시간이다. 거창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 내 이름이 불릴 일이 없듯 내가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일이 없기도 하다. 시간을 공간에 비유하면 새벽은 사람들의 발길이 잘 닿지 않은, 시간의 야외가 될 것이다. 한결 가볍고 자유로워진 나는 시간의 야외로 나가 바람을 쐬고 싶어 할 것이다.

나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내가 어떤 몸짓을 하든 그것은 나만의 춤이 될 것이다. 그것을 보며 비웃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나 혼자였던 것은 아니니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면서도 심심함은 느낄 수 있다. 그 때 내가 하는 일이 글을 쓰는 일이다. 마음 속에 있는 호수에 조약돌을 던지고는 그 일렁이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일 말이다. 글쓰기는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녹취하는 일이 될 수 있다. 어쩌면 그것은 낮에 지겹도록 듣는 타인들의 목소리를 겨워 할 줄 아는 이의 특권일 수도 있다. 타인의 목소리에만 귀를 기울이는 탓에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사람은 내 주위에도 많다.

변명의 결론이다. 나체를 보이는 일은 남세스러운 일이다. 상술하면 나를 보는 시선을 느낄 때, 혹은 그 시선이 있다고 상상할 때 나체는 남세스러운 것이 된다. 그리고 반대로 말하면 그것들을 의식하지 않을 때 나체는 부끄러운 것이 아니게 된다. 시선을 의식하지 않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나 역시 눈을 감는다. 감을 수록 잘 보이는 것이 있다. 달은 밤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달은 언제나 하늘에 있지만 햇빛이 그것을 가릴 뿐이다. 내 마음 역시 그렇다. 수많은 '당신'들에 가려졌을 뿐, 내 마음은 언제나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나는 감성을 만끽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요한 내 마음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이 글 역시 새벽에 작성됐다. 이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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