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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Feb 07. 2016

다섯 번째 편지

유스와 레버넌트, 두 편의 영화를 보고

설날입니다 형. 빠르면 어제부터 연휴에 들어가셨을 텐데, 명절은 잘 쇠고 계신지요. 저는 언제나처럼 편의점에서 일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언제나처럼 고향에 내려가는 근무자의 대타를 뛸 예정이네요. 그래서 내일부터 화요일까진 야간 근무를 하게 됐습니다. 지금이야 낮에 일하지만 이곳에서 처음 일할 땐 야간근무자로 들어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맞는 새벽은 뭐랄까, 피곤하지만 정겨운 느낌이에요. 물론 가끔 하는 일이니 그런 거겠지요. 확실히 명절 중이다 보니 사람들이 별로 없네요. 한가한  이때에 형께 드릴 편지라도 써야겠다 싶어 이렇게 인사말을 적습니다.


연휴 덕분에 다니고 있는 프로그래밍 학원도 일주일 동안 휴강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제게도 이틀 정도의 휴일이 생깁니다.  그동안 잉여시간은 있었어도 휴일이랄 게 없었는데, 고팠던 잠을 내내 자서 회포를 풀지 하루 종일 좋아하는 카페에서 시를 녹여먹으며 즐거운 고뇌를 할지 고민 중입니다. 영화를 보는 것도 생각했지만 사실 요즘 짬을 내서 영화를 몇 편 봤던 터라 고려하지는 않고 있어요. 최근엔 두 편의 영화를 봤는데 그 영화에 대한 감상을 얘기해드리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저번 주엔 “유스”라는 영화를 봤어요. 지금은 은퇴하여 스위스의 한 호텔에 휴양을 온, 영국의 유명한 지휘자 프레드 벨린저가 영화의 주인공입니다. 여왕의 전령이 프레드를 찾아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프레드의 대표곡인 “Simple Song”을 지휘해 주길 바란다는 여왕의 부탁을 전하러 온 것이었지요. 하지만 프레드는 그 부탁을 거절합니다. “개인적인 이유”라면서요. 그리고 그 개인적인 이유의 내막이 조금씩 드러나며 영화는 깊어지고, 넓어집니다. 이 주인공뿐만 아니라 휴양지에 있는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사연을 갖고 있어요. 그 사연들은 살면서 직면하는 다양한 존재론적인 질문을 관객에게 던져줍니다. 저는  그중 주인공의 오랜 친구이자 명망 높은  영화감독인 ‘믹 보일’의 이야기가 인상 깊었어요. 자신의 유작이라 선언한 영화의 대본 작업을 위해 동료 작가들과 휴양지에 온 믹은 작품 속 인물들이 죽음을 앞두고 나누는 대화를 고민하며 대본을 재차 수정합니다. 형도 궁금하지 않으세요? 우리는 우리의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하고 이 세상을 떠나게 될까요? TV에서 보았는데 퇴계 이황 선생은 “저 매화에 꼭 물을 주거라”라는 말을 남기시고는 앉은 자세로 입적하셨다고 합니다.


주인공인 프레드의 이야기보다 믹의 이야기에 더 주목했던 이유는 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어쩐지 프레드보다 믹이라는 인물을 통해 더 분명히 드러나있다고 느꼈기 때문이었습니다. 영화는 수영과 온천을 즐기는 사람들을 자주 보여줍니다. 15세 관람가임에도 그들의 나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지요. 다양한 몸들을 영화는 조명하는데 저는 어쩐지 그 몸에 새겨져 있을 이야기들, 그러니까 ‘서사로서의 몸’을 생각했습니다. 흔히 우리 몸의 주름을 나이테에 비유하잖아요? 하지만 굳이 노화를 통하지 않아도 우리의 몸은 하나의 이야기 그 자체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젊은이의 몸엔 젊은이의 이야기가, 늙은이의 몸엔 늙은이의 이야기가 깃들어 있겠지요. 영화는 마치 그 몸들을 보여주며 “여기 무대를 덮은 면막을 보아라! 그리고 그 내막을 보아라!”하고 저를 추동하는 것 같았습니다. 보이는 것의 내막, 그것이 궁금해 저는 글을 쓰고, 시를 읽는 것이겠지요.


저와 비슷하게, 영화에서 프레드와 믹은 한 가지 놀이를 공유합니다. 그것은 식사시간에 한 노부부를 관찰하며 그들이 언제쯤 대화를 할까를 두고 내기를 하는 거예요. 그 부부는 정말 한 마디 대화도 하지 않고 밥을 먹더라고요. 믹은 오늘에야말로 말을 할 것이다, 프레드는 오늘도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에 항상 돈을 거는데 저는 둘의 스탠스가 굉장히 의미심장하게 다가왔어요. 모차르트가 “언어가 끝나는 순간 음악은 시작된다.”라고 말했다지요? 그리고 영화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언어를 사용해 관객에게 말을 거는 예술이라는 점에서 그 내기가 마치 그 둘의 영혼이 어느 영토의 시민권자인지를 보여주는 것 같았습니다. 이 말고도 차마 말씀드리지 못할 풍부하고 다양한 서사들이 영화에 녹아들어 있어요. 마치 시를 읽는 기분이었습니다.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응축적으로 삶에 대해 생각할 거리들을 던져주는 영화이니 내리기 전에 형께서도 관람해 보시기를 권합니다.


그리고 이틀 전엔 그 유명한 “레버넌트”를 봤습니다. 이전에 봤던 “유스”와 달리 이 영화는 굉장히 단선적인 플롯만을 가지고 서사를 주파해 나갑니다. 죽임 당한 아들에 대한 복수, 그 과정에서 주인공이 지켜내고야 마는 생의 의지가 그것이에요. 주인공의 생존 욕구는 영화 <아포칼립토>의 주인공 “표범 발”을 떠올리게 합니다.  한 명의 욕구가 원수를 죽이기 위한 원동력이었다면 다른  한 명의 욕구는 원수에게 죽임 당하지 않기 위한 원동력이었다는 게 차이지만요. 19세기 미대륙의 원시적인 풍경이 인상 깊었습니다. 그 울창하던 숲과 역동적인 협곡들이 그 짧은 시간 동안 문명에 의해 도려지고 깎아져서 지금의 미국이 만들어진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대자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서로를 파괴해야 했던 이들의 생존 욕구 역시 시간에 다듬어져 프런티어 정신으로 추앙받고 있는 것이겠지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사랑”에 관한 영화로 읽었습니다. 인간은 무언가를 가지려 할 때보다 지키려 할 때 더 큰 힘을 발휘하고, 그렇기에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려는 힘인  “사랑”이야말로 강력한 힘이라고 믿는 저로선 이 영화가 그렇게 읽혔어요. 그런데 형, 복수는 정말로 무의미한 걸까요. 잃은 것에 대해 복수를 한다고 해서 잃은 그것을 되찾을 수 없으니 용서만이 해답이라는 말을 우리는 미덕으로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병이라는 것도 단선적인 인과관계를 갖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 이미 밝혀졌습니다. 상처가 될 만한 사건이 트라우마로 직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 시점에서 과거의 사건을 해석해 나가는 과정에서 병리가 생겨나는 것이라고 라캉은 말했지요. 그러니 애초부터 복수라는 행위도 잃은 것을 되찾고 싶어 하는, 단선적이고도 불가능한 욕망의 발로가 아닌 것입니다. 잃은 이가 처절하게 느끼는 현재의 상실감, 그것이 슬픔이 되고 절망이 되고 결국엔 원수에 대한 분노로 재해석되어 원수를 향해 빼드는 칼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무조건적인 용서란 말은 지극히 비인간적인 단어가 될 수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분노가 조건적인 것이니 용서 또한 조건적이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제가 믿는 종교의 격언들이 생각나 영화를 보면서 심란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상이 제가 영화를 보며 했던 생각들입니다. 어쩐지 저는 어떤 영화를 보면서도 마음 편히 볼 수가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무엇이든 읽어내야 한다는 강박이 이제는 생겨버린 것 같습니다. 한 번은 “읽다.”라는 말의 “ㄹㄱ”받침이 축음기의 바늘이 음반을 긁는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어 혼자 피식 웃어버렸습니다. 뭐든지 바늘을 대고 긁으면 음악이 흘러나올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나 봐요. 하지만 이 착각이 어쩔 수 없는 것이라면 저는 정확히 착각하고 싶습니다. 아버지의 장례식 때 고모께서 남동생을 보내는 마음을 시로 쓰셔서 저를 보여주셨는데, 그때 저는 그만 “좋네요.”라고 말해버렸어요. 가족을 잃은 슬픔이 절절히 담겨있는, 좋은 시였거든요. 다시는 이런 비인간적인 실수를 하지 않기 위해, “무조건적”인 말들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봅니다. 말의 당위와 조건을 철저하게, 정확히 따져 글을 쓰겠습니다. 형께 편지를 쓸 때면 더욱 그런 다짐을 하게 돼요. 이만 줄이겠습니다. 즐거운 연휴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형.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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