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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May 31. 2016

여섯 번째 편지

말의 밀도에 관하여

형, 지난 일요일엔 함박눈이 내렸습니다. 어쩌면 저 눈이 이번 겨울의 마지막 눈이겠구나 싶어 한참을 쳐다봤었네요. 아르바이트를 하던 중이라 이내 일을 해야했지만요. 그간 안녕하셨지요? 우리가 양력을 사용하는 덕분에 우리에게 겨울은 1년에 두 번 주어집니다. 한 해의 시작과 끝이 겨울이네요. 저는 겨울을 좋아하지 않지만은 이런 사실을 헤아려볼 때 겨울과 친해지는 일에 한 해를 잘 보내는 비결이 있지 않을까 생각도 해봅니다. 겨울과 친해진다는 것은 겨울의 속성을 발견해주고, 그것을 긍정해주고, 그래서 기꺼이 겨울을 닮아준다는 것이겠지요. 제가 형을 친하게 여기는 방법이 그렇습니다. 저는 형의 편지를 받아 읽으며 언제나 그 속에 담긴 형의 진심을 발견하길 원하고, 그것을 제 말로 녹여 제 마음의 일부분으로 삼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형을 닮길 원해요. 아쉽지만 아직은 요원한 일이네요.

아르바이트 얘기가 나왔으니 말씀인데요. 드디어 저의 아르바이트 인생이 끝났습니다. 실은 2월이 되고 나서 일하고 있는 편의점의 점장님께 이번 달까지만 일을 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학교도 졸업하는 지금 제 주말을 되찾고 싶었거든요. 고정지출에 관해서는 취업하기 전까지만 어머니와 누나에게 용돈을 타 쓰기로 했습니다. 20살이 되고는 제 지출을 온전히 부모님께 의지한 적이 없어 그것도 죄송하긴 해요. 그런데 어제 주말을 되찾아서 후련하다고 말씀드리니 “좋은 집에 태어났으면 그런 걱정도 안했을 텐데…” 하시며 말씀을 줄이는 어머니시네요. 그 말씀을 듣고 잠깐 생각해봤어요. 형, 저는 지금의 제가 정말 마음에 들어요. 제가 가진 결핍, 트라우마, 상처, 고독, 단점 이 모든 것들이 사랑스럽습니다. 특히 글을 통해 내적인 갈등을 해결할 줄 아는 저를 좋아하는데 이런 약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저는 없었을 것 같아요. 물론 경제적으로 부유한 집에서 자랐다고 해서 결핍을 갖지 않았겠냐만은 지금의 저를 제가 좋아하고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이겠지요. 당황한 마음에 지금의 제가 좋다고 말씀드리긴 했는데 어머니께 위로가 되었을진 모르겠습니다. 어머니께 더 잘 해야겠어요. 취업도 빨리 해야겠지요.

11월에 개강했던 학원 강의도 이제 종강을 앞두고 있습니다. 3월 중순까지 프로젝트를 완료하고 3월 말에 결과를 발표하면 끝이 나요. 수업 진도는 진작에 끝이 났고 1월부터 배운 것들을 바탕으로 실습을 하고 있는데 저는 소셜 크라우드 펀딩 서비스를 제작하고 있어요. 이 프로젝트를 고른 건 사실 꼼수였어요. 선생님께서 이전 기수의 작품들을 보여주신 적이 있었는데 그 중 소셜 크라우드 펀딩 사이트가 있었거든요. 이걸 고르면 선생님께서 그 사이트의 소스를 주실 것이라 생각하고 골랐던 것인데, 역시 그 소스에 기능들을 추가하는 방향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변명을 하자면 고작 3개월 남짓 배운 초짜가 단기간 내에 새로운 서비스를 만들어 낸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아마 제대로 손도 못 댔을 걸요? 그러니 저의 꼼수는 선생님과의 합의 하에 이루어진, 일종의 눈높이 교육입니다. 선생님도 제가 무에서 유를 창조할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으세요. 하지만 계속 이 바닥을 구르다 보면 세상에 없던 새로운 플랫폼을 통해 사람들의 일상에 새로운 즐거움을 주고 싶다는 제 꿈을 이루리라 믿어요. 그러기 위해 필요한 것은 지금의 저를 직시하는 일과 앞으로의 저를 응시하는 일이겠습니다.


학원이 종강하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형께서 물어주셨다 생각하고 즐거운 고민을 해 보자면, 또 한 편의 소설을 써 보고 싶어요. 언젠가 버스를 타고 집에 가는데 운전석 뒤에 설치된 광고판의 자막 뉴스로 어떤 소식을 접한 적이 있었어요. 저는 그 자막을 보고 한 가지의 야비한 생각과 한 가지의 숭고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 사건을 글감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것은 야비한 생각이었고, 그 사건을 글로 남기겠다 다짐했다는 점에서 숭고한 생각이었어요. 배우는 일상 속에서도 감정이 겨운 순간에 그 감정을 기억하는 연습을 한다지요. 글을 쓰는 저 역시도 순간의 감정이나 맞닥뜨린 사건을 두고 그것이 글감이 될 수 있을지를 가늠하곤 합니다. 어떤 소재가 글감이 될 만한지 그렇지 않은지는 품고 있어 보면 알 수 있어요. 영감을 얻은 즉시 글로 옮기지 않고 품은 뒤에 보면, 어느새 녹아버려 그 형체를 알 수 없게 된 것이 있고 감흥의 먼지가 쓸려나가 그 본연의 핍진성이 풍겨 나오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제가 받은 영감은 단연코 후자의 것입니다. 소재가 될 그 사건이 무엇인지는 훗날 작품으로 말씀드릴게요. 아마 완연한 봄이 되면 보여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형, 형께서도 아시겠지만 지난 일주일 간 국회 본회의장에선 말의 향연이 벌어졌습니다. 형도 그 잔치를 참관하신 적이 있으시겠지요. 일을 하면서도, 학원에 있으면서도 저는 틈틈이 그들의 말을 들으며 그들이 전하고자 하는 의미를 이해하려 했어요. 외국에선 무제한으로 토론하기 위해 샐러드의 요리법도 읊었다는데 한국의 야당의원들은 국회법에 따라 의제에 합당한 말들로만 발언해야 했지요. 단 하나의 의미 아래 그렇게 오랫동안 말들이 생산되면서도 그 말들이 하나같이 단단한 모습인 것이 저는 감동적이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언어의 저력을 확인하는 순간이었어요. 무제한 토론이 마무리되는 지금의 정국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저는 그것을 지켜보면서 ‘말의 밀도’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말이 많이 생산되고 또 유통되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그 어느 때보다 말의 밀도가 낮은 시대를 살고 있기도 한 것 같아요. 우리가 하는 말들엔 얼마나 짙은 의미가 담겨 있는가요. 의미가 옅어지는 자리엔 ‘의도’가 끼어들기 마련입니다. 이를테면 앞서 말씀드렸던, 곧 녹아버릴 영감을 가지고 글을 쓰다보면 결국에 전하고 싶었던 의미가 사라지고 무엇이든 써서 내보이려는 ‘의도’가 손을 이끌고 있음을 발견합니다.

의미의 ‘미’가 맛을 의미하고 의도의 ‘도’가 그림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의도란 눈에 쉬이 드러나는 것이고 의미는 눈으로는 발견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의미’를 발견하게 됩니다. 사전을 통해 저 단어들을 자세히 맛 본 결과이니 의미라 할 수 있겠지요. 제가 의도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지 않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프레임’이라는 단어를 좋아해요. 맛이 없고 가진 것을 보여주기에만 급급한 사람은 틀을 만들고 그 틀 안에서 근사해질 수 있겠지만, 이미 맛있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겐 그 틀이 참 못나보일 겁니다. 저는 맛있는 사람이고 싶고, 그 맛을 근거로 타인의 맛을 발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고고하게 저 혼자 그러고 싶다는 뜻은 아니에요. 저에겐 함께 글로 깊어지는 소소한 공동체의 꿈이 있어요. 공동체를 이루는데 있어서 좋은 기회란 곧 좋은 인연을 만나는 것일테고 언젠가 좋은 인연들을 만나게 된다면 저의 꿈에의 동참을 권유하고 싶습니다.

오랜만에 쓰는 형께 드릴 편지라 시간이 늦은 줄도 모르고 적어 내려갔습니다. 형은 혹시 오늘 들었던 말들 중 기억나는 말이 있으신가요? 다행히 전 오늘 편지를 쓰기 전에 보았던 만화에서 “극복하지 못하면 닮아 간다.”라는 대사를 읽었는데 이 대사만은 오늘의 문장으로 기억할 만한 것 같습니다. 지금의 제 현실은 불확실하고 불안하지만 그것들을 의지로 극복해 나가고 싶습니다. 저의 언어가 불확실해지고 불안해지지 않도록이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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