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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May 31. 2016

일곱 번째 편지

자존감에 관하여

제가 이 편지를 얼마나 쓰고 싶었는지 형께선 아마 짐작도 못하실 겁니다. 오후의 날씨가 이렇게 따뜻해진지 이번 주가 되어서야 알았어요. 어느 날에 하루종일 집에서 잠만 잤고, 그 다음 날도 오후까지 늘어져있다 외출 준비를 하고 집을 나섰어요. 길에 나서자마자 마신 숨의 따뜻함을 느끼곤 정말 봄이 왔다는 것을 실감했습니다. “봄이 왔다.”라는 문장을 마음에 떠올리고 나니 어쩐지 이 말이 제 상황에 대한 비유처럼 느껴져 소름이 끼치게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지난 겨우내 받았던 기술교육을 마쳤어요. 겨울이 끝났습니다 형. 그리고 봄이 왔어요. 바야흐로 따뜻해진 계절에 형께 편지를 씁니다. 잘 지내셨지요?

과정의 마지막은 그동안 제작해 온 프로젝트를 문서화하고 학생과 교직원 분들 앞에서 발표하는 일이었습니다. 마지막 이틀은 밤을 새다시피하며 문서화 작업과 발표 준비에 공을 들였어요. 이미 프로젝트는 완성되었고 그것의 내용을 잘 전달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지만 저는 어쩐지 그 일에 여느 때보다 더 큰 정성을 들였습니다. 문서 작성과 프리젠테이션은 학생 시절 일상처럼 하던 일이었기 때문에, 그 작업들이 마치 타향에서 고향 친구를 만난 것처럼 반가웠기 때문이었지요. 이번 겨울은 끊임없이 제 자존감을 시험받는 시간이었습니다. 제 능력 범위 밖의 일을 매일 해내야했지만 매일 실패했지요. 제가 겪었던 포기의 경험들은 하나 같이 사소하지 않았고 신념의 결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기에, 또 하나의 계기가 생기는 것이 아닌가 두려웠습니다. 실제로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한 학우가 중도 포기하고 학원을 나가는 바람에 더욱 그랬어요.

문서 작업은 마감일 직전에 완료했고, 발표 역시 잘 마쳤습니다. 노트북과 프로젝터가 연결되지 않는 돌발상황이 있긴 했지만 준비한 것들은 모두 해냈어요. 심사를 맡은 선생님들의 질문에도 막힘없이 대답해 냈습니다. 제가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지를 과정의 마지막 순간에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뿌듯했습니다. 그런데 과정의 마지막 순서까지 끝나고 나니 ‘끝이 좋으면 다 좋다.’라는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됐어요. 여지껏 그 말이 과정이야 어땠든 결론만 근사하면 됐다는 의미로 들렸는데 지금은 이 말이 끝을 보기 위해 감내해야 했던 많은 과정들에 대한 존중으로 이해됩니다. 자신이 너무도 대견했던 나머지 그 말을 확대해석한 것일 뿐이지만요. 사실 아직 끝이 난 것도 아닙니다. 제가 신청했던 취업 알선 프로그램은 교육 프로그램 수강 다음으로 본격적인 구직활동을 다음 단계로 두고 있습니다.

서론에 들었던 겨울의 비유를 계속하자면 겨우 월동준비를 마친 것이고 저의 겨울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이제 저는 자기계발에 더 힘쓰지 않았던 과거를 후회하고, 사회에서의 제 가치를 끊임없이 시험하며 느낄 자괴감과의 지난한 싸움을 벌이겠지요. 그 싸움에서 필요한 것은 역시 자존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게 있어 자존감이란 언어적인 것인데 비유하자면 이렇습니다. 저는 제 방정리를 할 때 평소에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날을 잡아 한 번에 정리하는 성격이에요. 그런데 방을 치워야겠다 생각이 들어도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가 안 나 갑갑한 느낌을 제일 먼저 받습니다. 그럴 땐 나중에 할까도 생각해 보지만 꾹 참고 저만의 주문을 외며 방정리에 대한 의지를 다잡습니다. 그 주문은 “천천히,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이라는 문장이에요. 이 문장을 외고 있으면 도저히 답이 안나오는 상황에서 제가 해야할 일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일단 그냥 눈에 보이는 것부터 정리해보는 것이지요. 그것이 원래 있어야 할 자리에 다른 무엇이 있다면 그 무엇을 정리하는 게 다음 임무가 될 겁니다. 상황 속에서 그렇게 방향을 잡고 해 나가는 것이에요. “천천히 천천히, 하나씩 하나씩”이라는 문장을 붙잡으면서요.


그런데 사실 자존감이 언어적이라는 말은 반만 맞는 이야기입니다. 자존감을 통장에 비유하는 것을 좋아해요. 자존감이란 제가 가진 정신력의 계좌들 중 하나이고 그 통장에는 플러스 통장과 마이너스 통장이 있다고 믿습니다. 플러스 상태든 마이너스 상태든 그 계좌는 모두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게 하는 근거가 됩니다. 그 근거가 아무리 소소하다할지라도요. 그중 경험에서 비롯된 자존감은 플러스 통장과 같습니다. “나는 할 수 있다.”가 이런 자존감의 표현형입니다. 근거의 신빙성이 자기 자신에게 있기에 검증이 가능하지요. 그렇기에 상황에 물리적인 힘을 발휘합니다. 4년 전 어린 나이에 창업을 준비할 때 호흡하듯 압박감과 불안감을 느꼈던 경험은 웬만한 스트레스에도 잘 무너지지 않는 근거가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번 겨우내 끊임없이 자괴감과 싸웠던 경험은 앞으로 저의 자격을 시험하는 어떤 상황에서도 용기를 발휘할 근거가 되겠지요.

반면 자존감은 문장에 기대 만들어지기도 하는데 이는 마이너스 통장과 같습니다. 그런 자존감의 표현형은 “나는 할 수 있다”가 아닌 “나는 할 수 있다더라”입니다. 근거의 신빙성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타자적인 언어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기에 주문인 것이고 본질적으론 미신입니다. 꼭 자기계발서가 주입시키는 무조건적인 긍정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방을 정리하며 왼다는 저 앞의 문장 역시 당면한 상황을 이겨낼 힘을 주는 훌륭한 주문이니까요. 직접 검증하지 않았음에도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내게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자산이고, 내가 검증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타자에게 진 빚입니다. 그러니 경험이 없다면 나에게 적용될 만한 문장이라도 수집해야 합니다. 자존감은 빚을 내서라도 지킬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니까요.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겠지요. 문장을 수집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 문장이 과연 주문으로 삼을 만한 가치가 있느냐 하는 것일 겁니다. 문자가 넘쳐 흐르는 시대엔 힘을 주는 문장의 질이 곧 자존감의 질인 것 같아요. 다시 말씀드리면 ‘좋은’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 같습니다.

형, 언어의 수행성에 대해 들은 적이 있으시겠지요. 거칠게 말하면 존재의 정체성은 선언과 같은 언어행위로 규정된다는 뜻이지요. 연인들에게 “1일”의 규정이 중요한 것처럼요. 이를 좀 더 일반화하면 언어에는 힘이 있다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합니다. 언어에는 힘이 있습니다. 경험에 담겨 있는 저의 역사가 저의 현재에 물리적인 영향을 미치듯 언어에 담겨있는 타인의 역사가 저의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두 역사 중 어느 것이 더 유서 깊은지는 명징합니다. 그리고 언어를 사용하는 저의 역사 또한 타인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사실이 저의 자존감만을 맹목적으로 위할 수 없게 만듭니다. 10년 하고도 몇 년 전, 미니홈피가 유행할 때 일기장에 이런 문장을 적어 놓고 뿌듯해 한 적이 있어요. “내가 가고 있는 이 길은 이미 누군가 갔던 길이고, 지금 누군가 가고 있는 길이고, 언젠가 누군가 갈 길이다.”라는 문장입니다. 이 말을 주문처럼 외며 제가 겪게 될 겨울이 유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되새기겠습니다. 당분간 쉬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지만, 글쓰기는 쉬지 말아야겠어요. 언제나와 같은 분량의 편지인데 쓰는 시간은 평소의 두 배가 더 걸린 것 같아요.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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