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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Jun 27. 2016

아홉 번째 편지

견딤에 대하여

장마 전선이 북상한다는 소식에 시원한 장맛비를 기대했는데, 우리 동네를 간질이기만 하고 다시 내려가버렸답니다 형. 아, 너무 덥네요. 형이 계신 곳은 어떤가요? 솨아-하고 퍼붓는 비가 와서 마치 체증 내려가듯 거리의 열기가 시원히 쓸려가진 않았는지요? 이번 주부터 다시 장마전선이 올라올 예정이라고는 하는데 저는 눈 뜨고 비가 오기만을 기다릴 수 없어 다음 주 열리는 물총 축제에 친구들과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어떤 물총을 준비해야 잘 준비했다고 소문이 나나 찾고 있는 중이에요. 그 날에 비가 와도 재밌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빨리 비가 잔뜩 왔으면 좋겠네요.


형, 직장 생활을 시작한 지 어느덧 한 달이 다 되어 갑니다. 최근까지는 신입 사원 수습 차 설비가 있는 분당으로 출근을 했다가 오후에 복귀하는 스케줄을 보냈던지라 꽤 피곤한 한 주였네요. 보통의 중소기업들처럼 시스템이 철저하진 않은 곳이어서 아직도 사원증과 명함을 지급받지 못했습니다. 아직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는 걸까요. 어쨌든 아직 연수 기간이 끝나기까지 한 달 여가 남았고, 저는 여전히 적응 중입니다. 열심히 눈치를 보고 있고, 지시받은 업무를 기한 내에 끝내지 못해 혼나기도 합니다. 여기저기서 맡기는 자잘한 업무들에 허덕이기도 하고요. 잘 적응하고 있는 것 맞지요?


사회생활을 갓 시작한 소감은 뭐랄까요, 업무량의 역치를 올리는 길 만이 제가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 것만 같습니다. 넓게 생각하면 스트레스의 역치인 것이고, 이것이 꼭 직장 생활에만 적절한 전략은 아니겠지만 유독 이런 생각이 들게끔 하네요. 이쯤이면 신입치고 많이 감당하고 있는 것 같은데, 까마득한 선임들이 들으면 콧방귀도 안 나올 소리겠지요. 맷집을 키워야겠다는 말을 굳이 변명처럼 길게 하고 있는 거예요. 사실 저 정도면 꽤 맷집이 좋은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벌써부터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게 신기해서 그렇습니다. 역시 세상은 넓습니다 형.


요즘 저는 ‘견딤’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언젠가 친한 후배에게 ‘삶이란 결국 견딤의 연속이 아닐까’ 하는 말을 했다가 대차게 혼이 났어요. 그 친구가 강하게 쏘아붙인 건 아니었지만 받아들이기에 그렇게 느꼈습니다. 왜 꼭 사는 게 견디는 일이어야 할까, 다 부질없다. 그런 얘길 하더라고요. 그래서 고민을 좀 해 봤습니다. 형께선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견딘다는 건 아프기만 한 일일까요? 꼭 그렇진 않아도 본질적으론 아픈 일일까요?

견딤에 대한 저의 이미지는 이렇습니다. ‘견딘다’라는 말을 떠올릴 때, 저는 몸을 웅크리고 엎드린 채 타인들의 발길질을 받는 제가 함께 연상됩니다. 그런 제 품엔 작은 상자가 있어요. 저는 발길질을 받다 보니 몸을 웅크리게 된 게 아니라 그 상자를 발바닥들로부터 지켜내기 위해 몸을 웅크린 겁니다. 그렇게 생각할 때, 등짝에 가해지는 발길질을 견디는 제 표정은 그리 고통스럽지 않아 보입니다. 등짝이 성공적으로 화끈거린다는 건 그 상자가 안전하다는 증거니까요. 그러니까 제가 무언가를 견디고 있다는 건, 그것을 견딤으로써 지키고 싶은 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얼핏 보면 대상에 대한 시혜적인 태도로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무언가가 되려 제가 견디고 있는 것을 견딜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제가 지켜내려는 것이 되려 저를 지켜주는 역설적인 기적을 저는 믿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결국 제가 삶이 견딤의 연속이라 말했던 건 삶이 고통의 연속이라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항상 무언가를 사랑하고, 사랑하는 대상 또한 나를 사랑하여 서로가 서로를 바깥의 발길질들로부터 지켜준다는 신념의 발로인 것입니다. 지금은 종영된 “동네 변호사 조들호”라는 드라마를 즐겨 보았는데, 그 드라마의 주제곡인 “하늘을 걸어”라는 곡을 요즘도 자주 찾아 듣습니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지켜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무엇이든이요. 어딘가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곡인데, 견디는 일은 아프지 않지만 지키는 일은 저를 아프게 하거든요. 지킬 것이 있다면 견디는 일은 쉽지만, 지킬 것이 있음에도 제게 지킬 능력이 있는가를 생각하는 일은 참으로 어렵고, 아픈 일입니다. 제가 지킬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요 형. 일단은 제 수면시간을 지켜야겠어요. 그것이 내일의 저를 지켜줄 겁니다. 다시 한 주가 시작됐습니다. 부디 지난 주의 형께서 지켜낸 것이 이번 주의 형을 지켜주길 바랍니다. 답장 기다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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