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생흔

김민철의 『내 일로 건너가는 법』을 읽고

by 여온

광고대행사에 카피라이터로 입사한 저자가 어느덧 19년차 크리에이티브 디렉터가 되어 팀장으로서 느끼고 배운 점들을 진솔하게 풀어낸 에세이로, 사적인서점 1월 처방책이었다. 대표님의 편지를 읽고 새삼 느꼈다. ‘그래, 분명 처음으로 나와 같은 일을 담당할 후임 기획자를 받게 됐다며 후임과 잘 지낼 힌트를 얻을 수 있는 책을 요청 드린 때가 있었는데 어느새 후임 기획자 뿐만 아니라 운영팀의 업무를 관리하는 PM이 되었구나.’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담당하고 있는 운영 PM 업무는 전 직장에서도 구축 기획과 함께 담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축 업무가 덜어진 지금은 담당 영역이 더 좁은 편이고, 아예 웹 기획의 기초가 없는 신입 직원을 교육해야 했던 전 직장과 달리 지금 회사엔 전공자 출신의 매니저(사원-대리)님이 계셔서 오히려 기술면에서 내가 배우는 부분이 있다. 정량적으로 보면 그렇고, 그나마 정성적으로 보면 팀원의 연차를 승인하는 입장이 됐다든지, 운영비 카드를 관리하게 됐다든지 하는 권한 측면에서 내가 PM이라는 자각이 들게 하는 순간들이 있다. 정확히는 그룹웨어를 사용하고 팀 운영비를 지급하는 회사에 들어왔다는 것 자체가 내가 성장했다는 증거겠지.


이제 웬만한 회사들이 수습기간으로 두는 근무 기간인 만 3개월도 머지 않았다. 1월 책처방 상담을 하고 나서 그런 나의 상황이 떠올라 PM으로서 좋은 인사이트를 받을 수 있는 책을 요청 드렸다. 그리고 책을 통해 딱 2가지의 인사이트를 얻었다. 하나는 ‘열심히 하기 위해 팀장의 역할에 매몰되지 말고 회사 바깥에서의 나를 키우는 일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렇게 얻은 안정감으로 팀원들로 하여금 조직 안정감을 느끼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전 세대와는 다르다. 이전 세대처럼 회사에 모든 것을 바치는 대신, 회사와 나 사이에 건강한 거리를 유지하며 회사도 나도 서로 잘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평생 직장은 없으니 어떤 식으로든 일하는 나를 지속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어떻게? 나를 키우는 일을 통해. 그러니까 지금 하는 일을 통해 무럭무럭 나를 키우는 것과 동시에 나 자신을 키우는 일도 병행하는 것이다. 누가? 바로 내가. 바로 당신이. 똑같이 회사에서 하루의 절반을 보내더라도 더 잘 자라는 방법은 분명히 있으니까. 8쪽
팀원의 실수를 다른 팀원이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마시킨다. 심지어 그 실수 덕분에 이런 결과물이 나올 수 있었다며 공을 떠넘기기도 한다. 한 팀원이 화가 아주 많이 났을 때, 다른 팀원이 의외의 태도를 보여주며 그 화를 가라앉히기도 한다. 큰 잘못을 한 것 같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팀장이 나타나 평소보다 더 차분한 모습으로 그 일을 수습하기도 한다. 그 과정에서 모두가 알게 된다. 이 팀은 안전하구나. 이 팀 안에서 나는 안전하구나. 이 팀을 믿고 기어코 나도 내 몫을 다해야겠구나. 안전하다는 감각은 한 명의 특출한 능력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순간순간 보여주는 태도에서 기인한다. 83쪽


직장인으로서의 나 뿐만이 아니라 그 바깥에서의 나도 키워야 한다는 데에는 나도 최근 관심을 갖게 된 참이었다. 2년 전부터 러닝을 시작했고, 콘텐츠를 소비하느라 새벽에 잠에 드는 습관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다. 읽고 쓰는 습관을 회복하기 위해 시작한 독후감이었다. 여전히 생산성을 쫓는다는 점에서는 저자의 의도와 방향이 조금 다르지만 일에 삶의 주도권을 주지 않기 위해 노력 중이다.


특히 ‘조직 안정감’은 선임의 역할을 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나도 중요하게 여기던 가치였다. 나의 경우 도제식으로 일을 배우며 업무 능력과 정신 건강을 맞바꾸듯 했었기 때문에 나에게 일을 배우는 사람들에겐 절대 그런 경험을 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나의 노력, 의도와 무관하게 나의 부족함과 미숙함으로 상처받는 사람이 생기곤 했고 모든 후임 기획자를 먼저 떠나 보낸 후에야 나도 이직을 하게 됐다.


그게 불과 반 년도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운영 PM직에 지원하는 한편 내심 걱정이 컸던 기억이 난다. 이곳은 PM에게 정말 본격적인 권한과 책임을 부여하는 곳 같은데, 내가 팀장 역할을 할 수 있을까. 내가 주니어는 아니지만 시니어는 더더욱 아닌데. 책에는 저자가 팀장으로서 본인이 옳다고 생각하는 리더십을 발휘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설명하는데 그 태도가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어 참고가 되었다.


그렇다고 다짜고짜 팀원들을 다그칠 수는 없었다. 팀원들이 기꺼이 연습하게 만들기 위해선 크고 푹신한 매트를 준비해야 했다. 어떤 말을 던져도 다치지 않는 안전한 매트. 그러니까 어떤 말을 해도 들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확신. 나는 귀를 아주아주아주 크게 만들기로 했다. 품을 아주아주아주 넓게 벌리기로 했다. 그리고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묻고, 들었다. 반영하고, 다시 물었다. 팀 사람들의 아이디어를 앞에 두고, 계속 물었다. 이렇게 하면 어떨까? 이런 이런 문제가 있을까? 괜찮을 것 같아? 근데 나는 이런이런 게 걱정이 되는데 그건 또 어때? 오! 이렇게 하면 캠페인이 좀 짜임새가 있을 것 같지 않아? 아닌가. 아! 좋은 아이디어 생각났다. 말하다 보니 또 이상하네. 아니야? 괜찮아? 114쪽


회의실에서는 '내 아이디어'가 '우리 아이디어'로 변한다는 걸 받아들이면 많은 것들이 달라진다. 우선 좋은 아이디어를 알아보는 눈이 생긴다. 누군가가 나의 아이디어를 좋게 봐주길 기다리는 대신, 수많은 우리 아이디어들 중에서 가장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골라낼 수가 있게 되는 것이다. 냉정한 눈으로, 넓은 마음으로. 왜? 이건 모두가 우리 아이디어니까. '우리 아이디어'라는 라벨을 달고 다른 팀을 만나고, 광고주를 만나야 할 테니까, 우리 아이디어가 어디서도 기죽지 않으려면 가장 반짝이는 아이디어를 골라내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132쪽


기획자로서 나는 각 분야 담당자들과 소통할 때 ‘맥락’을 제공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저자도 동일한 부분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대목이 나와 반가웠다. 내가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정말 중요하게 여길 만한 것이었구나 하는 느낌에 위로가 됐다. 기획자로서 나의 방향을 설정하고 그 방향 따라 걸어가는 게 꽤 외로웠기 때문이다.


피드백을 줄 때 한마디 말만 전달하지 않으려는 이유다. 최대한 내가 가진 정보 전부를 준다. 광고주의 성향부터 예상되는 반응과 이 제작물이 가진 특수성과 놓치지 않아야 할 핵심까지 전부를 준다. 내가 지금 왜 이런 판단을 하는지, 왜 특정 부분을 강조해달라고 말하는지 최대한 이해가 되도록 말한다. "폰트 좀 키워주세요"라는 단순한 피드백이 필요할 때도 있지만, 폰트를 키우는 것이 능사가 아니고 저 문장이 도드라지게 보이는 방법을 찾고 싶은 것이다. 그건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설명을 해야 한다. 전문가들이 고민할 수 있도록, 발판을 마련해줘야 하다. 그렇게 디자이너의 손부터 머리까지 모두 빌려와야 한다. 무엇보다 그들의 마음을 빌려와야 한다. 177쪽


팀장으로서 내가 가장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점은 착한 선임 컴플렉스가 있는 탓에 아쉬운 소리를 잘 하지 못하고 특히 나보다 선임인 동료와 그런 소통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권위에 스스로 지고 들어가며 위축된다는 점이다. 그런 상황이 생길 때면 내가 그 상황에 어깨빵(?)을 해서라도 어떻게든 ‘부딪쳐야’ 하는 상황이라고만 인식했는데 저자가 갈등을 이겨내는 법을 알려주지 않고 갈등을 갈등으로 정의하지 않는 관점을 알려주어 깊은 감명을 받았다. 내가 위에서 말한 상황을 두려워 했던 건 그런 소통이 나에 대한 호감도, 나의 영향력을 줄이는 행동이라 정의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임무의 달성을 위해 그 누구에게든 필요한 말을 할 수 있어야 하는 입장이고, 그 말의 의미가 가 닿기도 전 그 형식에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말 할 자신이 있다. 행여 상처 받더라도 자존심에 상처 받은 당신이 잘못이라 말하지 않고 기꺼이 나의 부덕함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할 자신이 있다.


한 사람이 들어와서 갑자기 팀의 긴장도를 확 높일 때가 있다. 필요한 유의 긴장감을 불어넣는 사람도 있지만, 소모적인 긴장감을 불어넣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또 한 사람이 들어와서 흩어져 있던 팀 사람들을 ‘우리'로 만들기도 한다. 소속감을 높이기 위해 회식을 하는 것도 아니고, 대단한 뭔가를 하는 것도 아닌데 팀의 모난 부분 들이 어느새 삭 갈려서 둥글둥글 변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 나의 물 이론에 따르면 당신은 그 모두가 될 수 있다. 당신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에 따라서 사람들은 달리 반응할 테니. 물론 하루아침에 달라지진 않을 것이다. 하지만 미세하게 사람들의 모양이 바뀌어 갈 것이다. 183쪽


그리고 나는 기회만 있으면 주변 사람들에게 ‘인생은 언제나 선택의 연속이지만 사람이 언제나 최고의 선택을 할 수는 없으니 최고의 선택이 무엇일지 고민하는 것보단 본인의 선택을 합리화할 수 있는 멘탈과 언어 능력’이라 말해왔다. PM은 닥쳐온 상황에 주변의 의견을 듣고 결정하는 직책이라는 점에서 확실히 인생살이와 유사한 면이 있다. 결정과 합리화에 대한 저자의 가치관이 나와 동일했다는 점에서 이 역시 위로가 됐던 부분이다.


물론 안다. '모두 팀장의 결정만을 기다리는' 이 표현이 얼마나 팀장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지. 내가 뭐라고 내가 이걸 다 결정하고 책임을 질 순 없잖아, 라는 진심이 튀어 나온다는 것도 안다. 이 결정이 틀린 결정이면 어떡하지, 라는 걱정이 무엇보다 앞선다는 것도 안다. 결정을 조금만 더 뒤로 미루면 더 좋은 결정이 가능하지 않을까, 라는 도피의 감정도 찾아온다는 걸 안다. 어떻게 아냐고? 그 모든 감정들이 매일, 매 순간 나를 찾아오고 있으니까. 그때마다 나는 한 문장을 떠올린다.결정을 하고, 그 결정을 옳게 만든다. 191쪽


나를 키워야 한다 말하는 첫 챕터에서부터 짐작했지만 이 책은 독자에게 ‘좋은 팀장이 돼라’ 말하는 책은 아니다. 저자가 좋은 팀장이 되기 위해, 좋은 팀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던 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이 본인에게 이롭기 때문이었고, 저자는 삶에서 직장이 차지 하지 않는 여백을 채울 수 있는 다른 의미를 찾으라 조언한다. 직장인의 자아만큼 단단한 자아를 만들수만 있다면 인생이라는 마차를 굴리는 두 바퀴가 될 것이라고. 맞다. 나도 나를 설명할 수 있는, 새로운 정체성을 굳히기 위해 노력 중이다. 이번 독후감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말을 많이 쓴 것 같은데, 하여튼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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