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소생흔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를 읽고

by 여온

12월의 처방책으로 ‘회사를 배경으로 한 소설’을 부탁드렸다. 조직 생활에 대한 인사이트를 얻으려 그런 책을 청한 것은 아니었고 『일의 기쁨과 슬픔』처럼 익숙한 용어와 상황이 등장해서 반가워하며 가볍게 읽을 수 있는, 대학생이 시트콤 ‘논스톱’을 보듯 즐길 수 있는 소설을 생각했던 거였다. 오늘 1월 책처방 상담에서도 말씀드렸지만 책을 읽으며 혼난 느낌이었다. ‘노동이 우스워?’하는. 우리나라의 노동 현실을 다루기 위해 결성된 ‘월급사실주의’ 동인의 작가들이 한국사회의 먹고사는 문제에 대해 문제의식을 갖고 그려낸 11편의 단편이 실려있다. 사실, 사실주의라고 하니 부담감부터 들었다. 역시나 읽으며 ‘진짜 이런 일이 있다고?’하는 의문이 계속 들 만큼 불편했다.


한 명의 작가가 일관된 문제의식으로 집필한 단편집이었다면 이만큼 다채로운 애환의 이야기는 만들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식품공장 노동자, 학습지 교사, 군무원, 중간 관리자, 건축사, 여행사 마케터, 자취 청년, 배달 노동자, 해외 노동자, 번역가, 교사와 같은 다양한 주체들이 각자의 현장에서 현실에 좌절하고 체념하고 순응하고 있었다. 그리고 소설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로도 대체로 그럴 것이다.


내가 이 소설의 한 단편을 담당하는 주인공이 된다면 이런 이야기가 가능하겠다. 취업 전,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던 Y는 손님이 오지 않는 시간을 이용해 계산대에 책을 펴고 공부를 한다. 시간은 직장인이 퇴근 후 일정을 마치고 귀가하는 밤 10시, 어느 남성이 들어와 캔맥주를 집어 들고 결제를 하려는데 Y가 펼쳐 놓은 전공책을 보고는 인자한 웃음을 지으며 말한다. “고생하시네요. 저도 취준할 때 편의점 알바 오래 했는데.” 목에 걸린 사원증을 보니 대리였다. 편의점을 나가는 대리를 보며 Y는 다짐한다. 나도 언젠가 대리 직함을 달고 밤에 편의점에 갔을 때, 학생으로 보이는 알바생이 공부를 하고 있다면 나에게도 당신과 같은 시간이 있었으며 당신의 노고를 응원하겠다 말해주겠다고.


상상하다 보니 재미있다. 좀 더 이야기를 이어볼까. 시간이 지나 그토록 선망하던 분야에 취업한 Y, 사무실이 있는 아파트형 공장(지식산업센터) 1층엔 편의점이 있다. 업종 특성상 야근할 일이 많았던. Y는 건물 내 인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시간에 퇴근하는 경우가 많았고 퇴근 전 편의점에 들러 담배를 산다. 주간엔 점장으로 보이는 어른이 점포를 지키고 있다면 저녁 이후에는 어린 남성이 계산대를 지키고 있다. 자신에게 담배를 건네주는 알바생을 보며 Y는 지난날의 결심을 떠올리지만 아직 사원이기에 약속의 실현을 훗날로 미룬다.


그로부터 더 시간이 지나, Y는 2년 차에 대리가 되었고, 3년 차에 2번째 사직서를 냈으며, 4년 차에 불안장애 약을 복용했다. 어느새 Y는 편의점에 들어 물건을 계산할 때 계산원의 얼굴을 보지 않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Y를 격려했던 그 대리는 그날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언젠가의 자신처럼 불확실한 현재를 견디며 오늘의 생활을 위해 일을 하는 청년을 보며 그는 그 시간을 이겨낸 자신을 생각하며 성취감을 느꼈을까. 그로부터 많은 시간이 지난 지금, 그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이런 상상이 가능하다는 것 자체가 이 책이 다루는 현실이 핍진하다는 증거겠다. 이야기로 미루어 나를 이해하게 하고, 나로 미루어 당신을 이해하게 하는 일. 이를 테면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을 마주할 힘도 없는 상태에서 한 발짝의 힘을 내고 고개를 드는 일. 기획의 말에서 필자는 이 소설집의 의의를 이렇게 밝혔다.


아름다운 노래가 재난을 당한 이들에게 위로를 줄 수 있고 그것은 예술의 힘이다. 때로는 찢어지는 비명이 다가오는 재난을 경고할 수 있고 그것 역시 예술의 힘이다. 위로의 노래가 필요한 순간이 있고 사이렌이 필요한 순간도 있다. 11쪽


시트콤 같은 이야기를 원했지만 뜻밖에 다큐멘터리 같은 이야기를 읽었고, 가벼워지고 싶었던 나는 무거워졌다. 정신을 바짝 차리게 됐는데, 공교롭게 최근 이직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1년에 24권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겠다던 결심은 24번째 독후감을 26년 1월에 쓰며 실패했다. 하지만 22번째 독후감 책이었던 『바늘과 가죽의 시』에서 얻은 교훈이었던 ‘생의 아름다움은 완벽해지는 것이 아닌 완성하는 것에 있다’는 말을 곱씹는다. 올해는 하고 싶은 것이 많다. 그러니 독서와 독후감을 루틴에 넣진 않겠으나 틈틈이 시간을 내어 계속 읽고 쓰고자 한다. ‘읽고 쓰는 사람’이란 정체성은 나를 이루는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이자 가장 사랑하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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