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사적인서점 책처방 상담 중에 대표님께서 만화책 한 권을 보여주셨다. 내가 읽으면 좋아할 이야기라고. 어느 직장인이 주인공인 단편 만화였다. 문예과를 나온 듯한 주인공은 현재 직장에서 여기저기 치이며 열심히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학교 동창들을 만나기로 한 날, 한 명은 SNS으로 근황이 공유되는 유명 작가, 다른 한 명은 문학상 후보에 오른 촉망 받는 작가다. 주인공은 그 둘을 보며 회유어를 생각한다. 헤엄치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참치, 글을 쓰지 않고는 못 견뎌 끝내 쓰고 말았고 글로 돈을 버는 작가된 친구들. 그러면서 바다 밑바닥에 땅을 붙이고 살아가는 자신을 비교하고 비관한다.
나는 평범하게 행복하다. 평범하게 일하고 평범하게 스트레스 받고 가끔 기분 나쁠 때도 있지만 다정한 애인이 있어서 평범하게 행복하다. 절실하게 쓸 만한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다. 분해. 글을 쓰지 않아도 행복해서. 167쪽
이 평범하기 그지 없는 서술이 마음을 쾅하고 내리쳤다. 어찌 이리 나와 같은지. 내가 눈을 반짝이며 상담이 끝나고 이 책을 사겠다고 하자 대표님께서 웃으면서 선물로 주셨다. 그 때 기분으로는 집에 오자마자 읽고 또 읽었겠지만 갓 들어간 회사에 적응하느라 책 읽을 겨를이 없었고 한 달이 지난 12월 하순이 되고서야 읽을 수 있었다.
작가의 상상력과 가치관이 드러나는 몇 개의 단편선으로 이뤄진 이 책은 단편답게 분명하고 간단한 주제의식을 만화로 그려냈다. “사물에게 이해받은 적이 있나요?”라는 질문을 독자에게 하는 듯한 「해변의 스토브」, 상상으로 창조되어 상상되지 않음으로 잊혀가는 존재들에게 상상으로 행복을 선사하고 싶었던 걸까 생각하게 만든 「설녀의 여름」, 사랑의 대상엔 연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물성을 제외할 수 없음을 알려주는 「당신이 투명해지기 전에」, 내 몸을 침범하는 통념에 동의하지 않을 권리를 생각하게 만든 「눈을 껴안다」, 창작을 생활로 여기는 자든 자아실현으로 여기는 자든 창작자는 사람을 사랑하는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 알려준 『바다 밑바닥에서』, 친구의 실존보다 존재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던 주인공이 친구가 사망한 뒤 친구의 실존을 흠모하던 사람을 만나 진정한 애도를 하게 되는 이야기인 「눈 내린 마을」, 이 작가가 단조로운 시공간에 빛을 비춰 숨겨졌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을 소명으로 여기고 있구나 느끼게 해준 「소중한 일」까지. 가볍게 읽을 수 있지만 곱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이야기들을 만족스럽게 읽었다.
꼭 내 상황과 닮은 주인공을 만나서는 아니고 내년엔 다시 글을 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 12월이다. 5년 일기장과 여러 신상 볼펜, 얇은 노트와 헤비츠의 노트 커버를 주문했다. 꼭 창작이 아니더라도 기록을 많이 하고 싶다. 10년간 쓰지 않았던 서간문을 다시 쓰고 싶다. 왜 그 동안 쓰지 못했는지, 쓰지 않았는지. 지금은 무엇을 쓸 수 있는지, 여전히 무엇을 쓸 수 없는지. 거창하게 여기며 부담감으로 쓰는 글이 아니라 가만히 흘러 나오는 생각을 담담히 적어보고 싶다. 올해의 가능한 불가능도 이제 1권의 독후감만 남기고 있다. 12월 처방책으로 하고 싶으니 빨리 책이 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