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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영기 Oct 22. 2015

1. 순이의 편지

순이의 편지

내일을 위해 자야 하지만
쉽게 눈을 감지 못하겠읍니다
아직 제가 보는 곳마다
당신의 내음이 나기 때문입니다
감아야 더 잘 보인다고 하지만
보이는 건 내가 만든 당신,
진짜 당신을 찾지 못하겠읍니다

오늘은 흰돌이와 앞마당을 뛰놀다
당신을 떠올렸읍니다
흰돌이를 쓰다듬다 당신이 자주 입던
흰 와이샤쓰가 생각이 났지요
니가 그 분이라면 참 좋겠군아
그렇게 생각했읍니다

어떻게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서울은 어떤 곳인지요
혹 못된 이들이 벗이랍시고
착하디 착한 당신께
해코지라도 하진 않는지요
지난 당신의 편지를 읽고
안심은 하였읍니다만
당신께서 우리에게
앓는 소리하는 분이 아니란 걸 아는 까닭에
낭보가 와도 걱정스럽읍니다

부족한 머리로 한 글자 한 글자
써 내려가다 보니
벌써 밤이 더 깊어졌읍니다
부디 항상 건강하셨음합니다
당신께 드릴 만남과 헤어짐의 인사가 같은 것은
제가 오직 헤아릴 것이
당신의 안녕 뿐이기 때문이겠지요

내가 시를 써야겠다고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쓴 시다. 이 시를 쓰게 된 계기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어머니의 일기장. 우연히 어머니의 일기장을 봤다. 어머니의 글에는  '그렇군아.'처럼 옛날 맞춤법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그런데 그 말투가 참 순박해 보여서 이 말투를 살려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다른 하나는 누군가에게 위로를 건네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말로 위로를 건네는 일은 내게 많이 조심스러운 일이기 때문에 이런 방식으로 에둘러 그 마음을 표현하고 싶었다. 멀리서 어쩌지 못하고 걱정만 하는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한 장면이 떠올랐다. 시골 소녀가 서울 간 정인을 생각하며 편지를 쓰는 모습.

난해한 비유를 쓰고 싶진 않았다. 누군가를 걱정하는 마음은 난해한 게 아니니까. 시라기 보단 정말 편지를 쓴다는 생각으로 쓰기 시작했다. '잠이 오지 않아 편지를 쓴다.', '오늘은 당신 생각을 하며 하루를 보냈다.', '도시 생활이 고되진 않을지 걱정된다.' 일상적인 연서에 담길 만한 내용들을 상상하며 써 내려갔다. 하지만 무난한 말로 시를 맺고 싶진 않았다. 난해한 마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범상한 마음도 아니니까. 소녀가 깊은 밤 잠들지 못하고 편지를 적고 있는 이유, 왜 그 사람에게 안녕을 묻고 안녕을 기원하고 있는 걸까. 그러다 문득 궁금했다. 왜 안녕이란 말이 인사말이 된 걸까. 누군가에게 단 한 마디의 말로 인사하고, 한 마디의 말만으로 이별해야 한다면 우리가 바라야 할 건 그의 안녕이기 때문이겠구나.

철학적인 내용도 없고 참신한 비유를 생각해 낸 것도 아니지만 이 시는 지금까지 내가 쓴 시들 중 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다. 소녀의 편지보다 그 편지에 적힌 마음이 시적인 것 같아서.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쓴 시들 중 제일 시적인 것 같아서. 그래서 이 매거진의 첫 시로 올린다. 시의 의미는 읽는 이에게 따른 것이라곤 하지만 나는 그냥 내가 바라는 대로 내 시가 읽혔으면 좋겠다. 그래서 내 시와 함께 시의 재료, 요리법을 함께 올려 놓기로 했다. 내가 시를 쓰는 원동력은 그저 나를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니 내 시의 가능성을 스스로 닫아 놓는 것에 부끄러움은 없다. 나는 시집을 읽으면서 입구조차 찾지 못하는 절망감을 참 많이 겪었다. 적어도 내 시에 있어서 만큼은 입구가 여기라고 알려주고 싶다. 해석의 가능성도 문을 찾을 수 있어야 열리는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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