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을 뽑았으니, 무를 베어보자
첫 탈락의 여운이 지나가는 것은 금방이었다.
지금이야 더 심하다고 하지만, 당시에도 녹록지 않았던 취업 시장인지라 쏟아지는 "귀하의 역량은 우수하나..."로 시작하는 탈락 통보들에 깊게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나는 쉴 새 없이 입사지원서를 썼다. 일정 시기가 지나니 지원서 하나를 쓰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지 않았다. 물론 이게 좋은 방법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쏜살같이 몇 개월이 흘렀고 그 사이에 무수한 면접을 봤지만 대부분 TO가 1명이었던 통에 최종면접에서 고배를 마셨다. 당시에는 약이 올랐는데, 이제와 생각해 보면 내가 그 자리에 가장 적당한 인물이 아니었던 것이라, 납득이 간다.
그렇게 시간이 지난 후에 이전에 고배를 마셨던 '그 채용 공고'가 다시 올라왔다.
이번에는 제대로 준비해보자는 작정으로 지원서를 썼다. 서류전형의 허들이 높지 않았던 건지, 자기소개는 나름 잘 썼던 건지 모르겠지만 이번에도 어렵지 않게 면접전형까지 치르게 되었다.
이전에 면접을 봤을 때 계속 지적받았던 부분이 바로 소프트웨어 분야에 대한 관심도와 왜 하고 싶은지에 대한 설명이었다. 이전에 면접장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이 퍽 그럴듯하게 느껴져 동일한 마음으로 면접을 준비했다.
지원 동기를 리마인드 차원에서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1) 미래에는 여러 분야의 전문성을 가지고 복합적으로 이를 활용하는 것이 경쟁력이 될 것이다.
2) 소프트웨어를 통해 비전공자로서 막연하게 생각한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다.
3) 더 어릴 때, 새로운 것에 도전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가 좀 있었다. 나 스스로 왜 이 분야에 뛰어들고 싶은지는 명확했지만, 이걸 면접관들에게 어떻게 증명하는가가 물음표였다. 내 머릿속 생각은 사실 나 자신만 아는 것이지, 머리 위에 "나하고 싶어요, 진심이에요"라는 말풍선이 둥둥 떠다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면접관들이 이걸 납득할 수 있도록 설득하는 무엇인가 필요했다. 전략을 세우기 위해 이전에 고배를 마셨던 면접에서 주로 공격(?)처럼 느껴졌던 부분이 어떤 것이었는지 떠올렸다. 사실 당시 면접관들은 나에게 많은 기회를 줬다.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참석한 것 치고는 꽤나 관심을 가져줬다고도 할 수 있겠다. 기억에 남는 질문은 이랬다.
"OO 씨는 관련해서 뭐 한 것 없나요? 관련 책을 읽었다던지... 평소에 특별히 이쪽 분야 일을 한다면 해보고 싶었던 프로젝트라던가"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질문이었지만 준비가 안 된 당시의 나로서 대답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으니 탈락하는 것도 당연했다.
몰라서 하는 첫 실수는 그저 실수지만, 두 번째 실수부터는 실력이라고 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당시 내 약점이 되었던 부분을 보완하려 했다.
먼저, 도서관에서 소프트웨어 분야에 관련된 책들을 잔뜩 빌려왔다. 빌려 온 책 중에는 학술적으로 해당 분야에 대한 지식을 알려주는 책도 있었다. 하지만 지식적인 기반이 없는 상태라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면접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무작정 어려운 책을 붙들고 있을 수는 없어서 다른 책을 찾았다.
지금도 기억나는 "프로그래머로 사는 법"이라는 책이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내용이 기억나는 걸 보면 여간 강렬했던 게 아니다. 제목만 보면 태생부터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정해진 사람들의 성공 비결 같은 느낌이 들지만 - 물론 그런 사례도 책 안에 존재한다 - 반 정도는 비전공자로서 이 분야에 뛰어들어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물론 그들은 특출 난 인재들이긴 했지만,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이 분야에 있지 않더라도 충분히 전문가가 될 수 있겠다는 확신을 주었다.
실제로 이 소감을 면접에서 마지막 하고 싶은 말로 했던 기억이 난다.
"제가 이번 면접을 보러 오기 전에, 개발자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 궁금하다는 마음으로 '프로그래머로 사는 법'이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의 성공담 같은 걸 묶어둔 책이었는데요. 제가 인상 깊었던 부분은, 책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사람들이 학부 시절에는 이 분야를 전공하지 않았다는 점이었습니다. 업으로 삼는 일이 꼭 처음 전문적으로 배운 일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비전공자이지만 용기 있게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서 어떠한 성과를 이루어 낸 책 속의 인물들처럼, 저도 용기를 가지고 도전한다면 이 분야에서 성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어서 지원했습니다. 뽑아주신다면 이 동기를 잊지 않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몇 년이 지난 지금 생각해 보면 다소 오글거리기까지 한 패기 있는 답변이었다. 면접관들이 이 말에 설득당한 건 지는 알 수 없지만.
또 하나는 어떻게 보면 특별하지 않을 수 있지만, 평소에 불편을 느꼈던 부분들, 개선된다면 좋을 것 같았던 부분들을 소프트웨어적으로 어떻게 풀어내면 좋을지 생각했다. 회사에서 전공자가 아닌 사람을 굳이 개발자 포지션으로 채용하려는 이유는, 비전공자로서 내세울 수 있는 어쩌면 허무맹랑할 수도 있는 아이디어를 포착하고자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생각했던 아이디어는 위치 기반으로 쇼핑에 유용한 할인, 신제품 정보를 제공하는 위치기반 쇼핑정보 애플리케이션이다. 아이디어와 함께 이를 실제로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면서 막연하게만 느껴졌던 개발 분야에 대해 기본적인 지식들을 얻을 수 있었고, 이 부분이 면접 시에 평소에도 이 분야를 관심 있게 지켜봤다는 증명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사소하지만 기본적인 준비들로 진행한 면접 결과는 합격이었다.
당시 다른 기업의 마케팅 직무로 진행 중이던 면접들이 있었지만, 최종 합격 여부가 불투명하고 빨리 취업준비 생활을 끝내고 싶은 마음에 나는 첫 직장생활의 단추를 개발자라는 이름으로 꿰기로 결정했다. 새로운 도전을 하기 위해서 몇 개월이 넘는 시간이 있었지만, 사실 그 과정은 정말 시작에 불과했다. 입사 후, 더 길고 어려운 과정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