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unaticbreeze Jan 03. 2021

어느 날 갑자기, 개발자 (1)

페르소나 이야기 그 첫 번째, 나의 업 - 개발자, 그 시작에 관해

"무슨 일 하세요?"

보통의 첫 만남에서, 큰 힘을 들이지 않고도 대화를 이어나갈 수 있는 질문이다. 

대개 "저는 OOO 한 일을 하고 있어요", 혹은 "OOO에서 OO로 일하고 있습니다." 정도의 짧은 문장으로 마무리 지으면, OOO에 대한 이야기로 자연히 주제가 넘어가기 마련이다. 


내 경우는 조금 다르다. 직업을 설명하는 데 사족이 길어지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나의 직업은 개발자이다. 


좀 더 자세히는 최근에 각광받고 있는 머신러닝 기반 인공지능 모델 개발 분야에 재직하고 있다. 여기까지만 이야기했을 때 왜 사족이 붙는지 의아할 수 있다. 말이 길어지는 이유는 내가 애초부터 이 분야의 전문가는 아니었기 때문에, 다시 말하자면 비전공자이기 때문이다. 


인공지능 분야가 주목받기 시작한 4~5년 전부터 최근까지의 상황을 생각해 볼 때, 비전공자가 인공지능 모델 개발자로 근무하는 것은 그리 놀라운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순수 자연과학 분야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음악과 같은 예술의 영역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인공지능을 적용하기 위해 뛰어들고 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자연과학 분야의 경우 인공지능 분야 진입을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지식들 - 예를 들면 수학이나 통계, 기초 프로그래밍 같은 것들 - 을 이미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또한 기존에 타 분야를 전공했더라도, 인공지능 적용을 위해서 일정 기간을 두고 학원이나 온라인 강좌를 통해서 기반 지식을 쌓거나 아예 석사과정을 밟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것이 나와 다른 점은, 개발자로 일하기로 결심한 시점이 내게 아무런 기반 지식도, 해당 분야에 대한 정보도 거의 전무했던, 그저 평범한 문과대학 졸업생일 때였다는 것이다. 


나는 그렇게 어느 날 갑자기, 개발자가 되었다. 


내게 개발자로의 전환 계기가 되어 준 것은 당시 유행과 같았던 "융합" 키워드를 내세운 한 회사의 채용 프로세스였다. 당시 IT 분야의 혁신을 이끌었던 몇몇 리더들이 단순히 한 분야의 전문가가 아니라, 여러 분야의 융복합적 센스를 강조하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면서, 이 트렌드가 기업의 채용 형태에도 영향을 준 것이다. 


골자는 이러했다. 기존에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새로운 시각을 가진 인재를 채용 후, 일정 기간 교육을 거쳐 개발자로 근무할 수 있도록 한다. 이렇게 양성해 낸 개발자들이 본인들이 전공했던 분야들에 대한 내공과 시각을 개발에 섞어 냄으로써 자아내는 새로운 효과를 기대하는 취지다.


실제로 기획 당시 기대했던 목적을 달성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기존의 동향을 비트는 신박한 채용 프로세스로 주목받는 데에는 성공한 듯싶다. 융합을 강조하는 채용 트렌드에 대한 기사가 연일 쏟아졌고, 많은 취업준비생들이 비슷한 채용 공고에 많이 지원했다. 


꽤나 인기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공고가 나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에는 그다지 지원할 생각은 없었다. 도무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로그래밍? 소프트웨어 개발이라니,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나는 중학교 2학년 이후로 흔히 말하는 '수포자', 수학을 포기한 학생이었다. 문/이과가 분리되던 시점부터 학교 정 반대편에서 공부하는 이과 동창들의 학업은 다른 세계였다. 대학에 진학하고 중앙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공대를 다니는 동기들도 많이 있었지만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자들을 읽고 있구나,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살면서 단 한 번도 그들이 공부하는 그 분야에 발을 들일 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리 대상자가 비전공자라지만 내키지 않았다.


생각을 바꾸게 된 것은 스터디 멤버들 때문이었다. 

당시 참여한 지 얼마 안 된 취업스터디의 멤버들은 밑져야 본전 아니냐며, 합격하고 나면 그때 고민해도 늦지 않다고 나를 설득했다. 다들 나보다 최소 1~2년에서 4~5년은 선배였기 때문에 고집 피울 재간이 없었다. 그렇게 취업스터디 멤버들에게 등 떠밀려 마감 직전 지원서를 제출하고, 운 좋게 면접까지 보게 되었다. 면접장에 들어설 때까지만 해도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하던 참이었는데, 

그 날 진행했던 30분가량의 직무 면접이 내 생각을 사뭇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면접장 안에는 나와 달리 초롱초롱 빛나는 눈을 한 지원자들이 가득했다. 별생각 없이 지원한 것 치고 그들과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는 사실이 미안할 정도로,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사람들이었다. 취업 준비생으로서 일자리에 대한 간절함이야 어느 누구 못지않았지만, 직무 자체에 대한 흥미는 부족한 것이 사실이었기에 다소 머쓱한 상태로 직무면접이 시작되었다. 


차례로 긴장을 풀기 위한 자기소개를 끝낸 후, 본격적으로 직무에 관련한 질문이 들어왔다. 옆자리에 있었던 지원자는 전공자는 아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분야에 지속적으로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어필하면서 본인이 했던 각종 대외활동을 읊었다. 그 옆 지원자는 왜 이 직무가 유망한 지에 대해서 오목조목 설명했다. 시간이 지나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당시 면접장에 4~5명 정도의 지원자가 한 번에 들어갔는데, 직무에 대한 사전 조사나 유관 활동이 없는 사람은 내가 유일했다. 


몇 가지 질문이 지나가고 이번 면접은 아무래도 가망이 없다고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스스로를 어필하는 대신에 함께한 면접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은 대부분 이러했다. 

1) 미래에는 여러 분야에 대해 전문성을 가지고 이를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사람의 경쟁력이 우선할 것이다. 비전공자로서 컴퓨터 소프트웨어 분야라는 새로운 분야에 뛰어드는 이유다. 
2) 컴퓨터 소프트웨어는 비전공자들이 막연하게 떠올리던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는 방법론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이다. 
3) 새로운 분야에의 도전은 젊을 때 할수록 경쟁력이 있다. 학부를 마친 지 얼마 안 되어 공부에 대한 감각이 있을 때 도전하고 싶다. 


처음 공고를 보면서, 심지어 지원서를 작성하고 면접장에 들어서는 순간에도 생각해보지 못한 부분들에 대해 동료 면접자들이 조목조목 짚어 주었다. (나 빼고) 치열했던 면접이 끝나고, 2주 정도가 지난 후에 직무 면접 합격자 발표가 나왔다. 

결과는 탈락. 기본적인 준비가 부재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결과를 받아 들고 나는 면접 당시를 떠올렸다. 시간이 지나도 고개가 끄덕여지는 옆자리 지원자들의 말이 생생했다. 

역설적이게도 기회를 잃은 순간에, 기회에 대한 간절한 마음이 생긴 셈이었다. 

그 날 이후로, 나는 마음속으로 다음 공고를 손꼽아 기다렸다. 설마 한 번으로 끝나진 않겠지 하는 마음으로. 물론 기존에 지원하던 직무 준비는 계속하면서, 한 편으로 다른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 다음 글에서 계속

작가의 이전글 나를 둘러싼 페르소나(Persona)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