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엄마, 나의 외할머니

꽁꽁꼬리. 임수현. 동시집 [고슴도치 선크림 바르기]

by 김볕

"할머니"


할머니란 단어를 떠올리기만 해도 눈물이 핑 도는 나는, 할머니가 늘 그립다.


내가 다섯 살이 된 무렵 남동생이 태어났다. 심장 판막에 구멍이 생긴 채 태어난 남동생은 태어나자마자 병원신세를 졌다. 부족한 살림에 많이 배우지 못한 나의 부모님은 아들의 입원비와 수술비를 마련하느라 정신이 없었기에, 어린 딸을 돌볼 여유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렇게 여섯 살이 된 나는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경주의 작은 마을, 건천. 이름과 다르게 할머니 집 앞에는 뚝길을 따라 작은 실개천이 흘렀다. 동네 언니 오빠들을 따라 뚝을 걷다 보면 검은 염소가 눈 똥을 볼 수 있는, 운이 좋으면 염소와 눈 맞춤도 하는 조그만 시골 동네였다.

매일 일어나 툇마루에 앉아서 내가 마주하는 풍경은 할아버지의 경운기와 오토바이, 할머니의 텃밭이었다. 할머니는 주로 우물 곁에 만들어진 수돗가에서 분주하게 일을 했다. 할아버지는 아침만 드시면 작은 오토바이를 타고 밖을 나가 집에 잘 계시지 않았다. 어린 외손녀에게 혼을 내지도 그렇다고 측은하게 여기 지도 않은 조부모의 무덤덤함은 오히려 나를 더 편안하게 해 주었다.


혼자가 된 나는 혼자 노는 법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먹고 남긴 음식 위에서 손을 비벼대는 파리도, 할머니가 심어놓은 호박꽃도 심심한 나에게 친구가 되었다. 상상의 세상에선 모든 것이 가능했기에. 나는 호박꽃의 잎을 다 떼어버리곤 암술에 뭍은 노란 꽃가루를 매니큐어처럼 손톱에 바르고 공주처럼 걸었다. 너무 심심한 날이면 작은 방에 걸려있는 거울을 보며 코끝을 찡긋거리며 마녀 흉내를 내다 민망함에 괜히 자지러지게 웃기도 했다. 가끔 놀러 오는 뒷집 언니랑은 병원 놀이를 하곤 했는데, 배를 깔고 누우면 도끼빗으로 살살살 문지르는 게 우리만의 수술 비법이었다.

그렇게 일 년 남짓 지내는 동안 나는 상상에서 현실로 놀이의 영역을 확장하며 동네 언니 오빠들 따라 들이고 산이고 강이고 시골 강아지처럼 돌아다녔다.


어느 여름날, 해질 무렵까지 놀다 들어온 나는 오랜만에 엄마를 보았다. 엄마가 온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는데. 무척이나 화가 난 엄마는 늦게 온 나를 보자마자 소리치며 혼을 냈다. 이렇게 늦은 시간까지 놀다 오면 어떡하냐고. 옆에 세워져 있던 나무 빗자루를 들며 나를 때리려는 엄마를 할머니가 말렸다. 왜 아이한테 그러느냐고 오히려 자신의 딸을 혼냈다. 잘 놀다 왔으면 되는 거라고 나를 꼭 안아주던 할머니. 그렇게 뭐든 괜찮다 해주던 나의 외할머니였다.


임수현의 동시 「꽁꽁 꼬리」는 할머니와 손녀의 이야기다. "문 닫아야지/ 꼬리가 길기도 해라"로 시작하는 할머니의 말로 다정하게 시작되는 동시는 흰 실을 자르는 가위로 손녀의 꼬리를 자르는 할머니의 모습을 통해 환상의 공간으로 독자를 초대한다. 꿀단지를 꺼내려다 선반을 무너뜨리고, 라면을 냄비째 엎어버리는 등 어린 손녀의 이런 실수를 너그럽게 받아주는 할머니는 손녀에게 "얼음 구멍에 꼬리를 집어넣고/ 물고기를 잡으려다 꼬리가 꽁꽁 얼었다는" 웃긴 호랑이 이야기를 해주신다. 웃긴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는 엄마를 생각한다.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해도 보이지 않는 엄마의 꼬리는 지금 아이 곁에 부재한 엄마의 존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팔딱이는 물고기를 들고 올 것" 같아서 문을 계속 열어 둔 아이의 마음을 아는 할머니. 손녀의 "꽁꽁 언 꼬리"를 이불 밑에 넣어주는 것으로 이야기는 끝이 난다.


어린 외손녀를 곁에서 지켜보았던 나의 할머니가 떠오른다. 아무리 놀아도 채워질 수 없는 부모의 존재,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손녀의 마음과 자신의 딸을 안타까워 하는 딸의 마음을 둘 다 느낄 수 있었겠지. 그래서 할머니는 나의 엄마의 엄마로 모든 것을 품고 품어주신 걸까. 엄마이자 딸로 살고 있는 나는, 커가는 아들을 보면서 지나온 엄마의 마음을 조금씩 짐작하게 된다. 이런 마음으로 나를 키웠겠구나. 안쓰럽고 안타까운 마음, 뭐든 내어주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을 몰라줄 때의 속상함까지. 나에게 허락된 딸의 시간은 점점 줄어가고, 엄마의 시간은 점점 늘어가겠지. 언젠간 외할머니를 그리워하듯, 언젠간 엄마를 그리워할 시간이 오리라는 것도.


몇 해전, 할머니댁에서 보낸 어린 시절이 나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고 말했다. 자신에겐 너무나 힘들고 어려운 시절이었겠지만, 나는 덕분에 세상을 향한 다정함을 품고 지금까지 잘 살아갈 수 있다고. 나의 말에 엄마는 마음의 짐을 좀 덜었을까. 다시 엄마의 마음으로 생각해 보니, 아니겠다 싶다. 늘 자식에게 잘해주지 못한 미안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니까. 이제는 세월이 흘러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며 집에 놀러 올 자식의 꼬리를 기다릴 나의 엄마. 나의 엄마는 하나뿐인 외손자에게도 아직 들려주지 못한 이야기가 많고 많기에. 이번 겨울에는 날 기다리느라 엄마의 꽁꽁 언 꼬리를 따뜻하게 만들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