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독립을 꿈꾸며

「12월의 노래 」 이해인 시

by 김볕
유독 올해 여름, 엄마가 집에서 보내준 김치가 하나같이 맛이 없었다.


국내산으로 만든 김치의 손맛을 내세우는 식당도 마찬가지. 이유를 물어보니 더운 날씨 탓이란다. 배추는 평균 25도 이하에서 잘 자라는 작물이다. 그래서 더운 여름엔 서늘한 기온을 유지하는 강원도 고랭지 지역에서 배추가 주로 생산된다. 분명 8월 안반데기에서 촘촘히 자라던 푸른 배추를 보고 왔는데. 추석 즈음 뜬 기사에서 고랭지 배추가 누렇게 변한 사진을 보고 적잖이 놀랐다. 겉은 멀쩡해도 속은 물러버린 상태의 배추. 강릉 지역에 속하는 안반데기는 역대급 가뭄으로 농업용수조차 충분히 확보되지 못하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다행히 날씨가 추워지자 떠나간 김치 맛이 돌아왔다.


겨울이 곧 온다는 신호다. 배추의 알이 찬다는 것은 김장철이 다가온다는 뜻이다. 부모님은 귀촌 후 텃밭에서 김장에 필요한 배추와 고춧가루를 자급자족하게 되면서 김장 준비에 대한 부담을 많이 덜 수 있었다. 남쪽 지방은 기온이 좀 더 떨어져 배추가 실해지는 12월이 중순이 김장철이다. 당장 먹을 김치가 없을 걸 예상한 엄마는 나에게 미리(맛)보기 김치를 택배로 보냈다. 아, 바로 이맛이지.


엄마는 오늘 김장을 한다. 손수 절인 배추와 준비한 고춧가루를 나의 시댁에도 보내기 때문에 양가는 거의 비슷한 날짜에 김장을 한다. 어머님도 김장을 하고 계시겠지. 그 덕분에 여태껏 김장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딸이자 며느리로, 마흔이 넘어서도 친정과 시댁, 두 가지 버전의 김치를 늘 받아먹는다. 끊이지 않고 언제든 받아먹을 수 있는 김치가 양쪽에서 든든하게 있으니 아직까지 김치냉장고 없이도 잘 살고 있다.


올 여름은 맛이 없어진 엄마의 김치 대신 마트에 놓인 김치를 종종 사 먹었다. 대형 회사에서 만든 김치를 둘 다 먹어보고 깨달았다. 집집마다 김치의 맛이 다르듯 회사에 따라 맛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구나. 계속 먹다 보니 직접 담근 김치가 먹고 싶어졌다. 그리고 김치 가격이 올라도 너무 올랐다.


'직접 김치를 담아볼까?'

올여름에 담아본 깍두기 맛이 꽤 괜찮았기에, 김치 담그기도 조금 자신이 생기기도 했으니까. 난 아이가 어릴 때 배추김치를 담았다가 망한 이후 시도하지 않았던 그 도전을, 거침없이 다시 해보기로 했다.

마늘, 양파, 생강, 배, 고춧가루를 넣고 믹서기에 갈았다. 원래는 발효를 위해 찹쌀풀을 쒀서 넣어야 하는데 갓 지은 밥을 덜어 믹서기에 넣는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액젓으로 간을 하면서 고춧가루도 좀 더 넣어가면서 꽤 걸쭉한 김치 양념을 만들었다. 매콤 짭짤해진 양념을 큰 통에 담고 소금에 절여둔 배추를 넣었다. 지금까지 먹어본 김치와 비교해 보며 맛을 보고, 다시 버무리기를 여러 차례. 내가 고른 늦여름 배추는 성장촉진제를 많이 뿌렸는지 이상할 정도로 흰 줄기긴 두꺼워서 소금에 제대로 절여지지 않아 배추 풋내가 많이 났다. 다행히 오래 두고 푹 삭힌 김치는 찌개로 끓여 먹기에 꽤 괜찮았다. 다음번엔 잘할 수 있다는 나 자신에 대한 믿음. 뭐니 뭐니 해도 김치맛은 배추가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또 하나 배웠다. 언젠가는 완벽한 김치 독립의 순간을 맞이할 것이다.


이해인 「12월의 노래 」는 수도원에서 수백 포기의 배추 놓고 김장하던 수녀님의 경험으로 빗어진 시다. 시에서는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김장의 풍경을 통해 한 해를 마무리하는 마음과 연결 짓는다. 시인은 12월을 "하얀 배추의 속 같이/ 깨끗한 내음"이 난다고 표현하였다. 그럼 지금 맞이한 12월의 나는 어떤 마음 상태일까 생각하게 한다. 애타게 바란 꿈, 이를 이루고자 노력한 시간들, 그렇지만 계획처럼 따라오지 않는 몸과 마음. 아무것도 한 것 없이 한 해가 끝나버린 허무함에 빠져들기 쉬운 시기다. 그러나 시는 12월은 후회와 미련이 아닌, 새해를 맞기 위한 새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말한다. 지난날은 잊어버리라고. 온몸이 부서져야 양념이 되는 마늘, 파, 생각처럼. "부서지지 않고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음을/ 다시 기억"하면 된다고 말이다.


땅 속에 묻힌 김치가 맛있게 익으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듯, 외롭고 쓸쓸하다면 내가 깊어진다 생각하자.


무언가를,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참고 기다리는 마음이 필요하다. 어쩌면 12월은 습관이 되어버린 익숙함과 편안함에서 멀어져 "자신을 통째로 묻고 서서" 볼 시간이지 않을까.


늘 받아먹기만 하던 김치를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나는, 언젠가는 김장 김치를 받지 못하는 시간이 올 거라는 걸 아는 나이가 되었다. 김치의 독립을 꿈꾸는 건 이별과 슬픔에 미리 준비하는 마음인 걸까. 부모에게 받는 사랑이 당연하다고 여기지만, 영원하지 않다는 걸 우린 잊고 산다. 이후에 찾아 올 아쉬움과 외로움은 세상에 남아있는 자식의 몫이다. 아직 그때가 한참 남아 있다 믿기에, 나의 김치 독립은 서서히 그리고 천천히 해나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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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과 관련된 시가 실린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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