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름, 달이 기우면

「수리공 」온선영. 『나의 작은 거인에게』상상 2024

by 김볕
춘천은 처음이었다.

스무 살에 맞이한 독립은 예기치 않은 장소에서 시작됐다. 경주에서 같은 대학에 지원한 다섯 명 중 합격자는 A 포함 둘이었는데, 당시 극 E성향의 나와 극 I성향의 A랑은 서로 맞을 리 없었다. 그렇게 거의 혼자나 다름없는 둘이서 춘천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음악교육과를 지원한다는 A의 말을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어떤 과를 지원할지 결정하지 못했다.


"우리 과 분위기 정말 좋아요."라는 다정한 말이 들려왔다. 입구 앞쪽에서 자신의 과를 홍보하던 한 선배였다. 나는 어색한 서울말로 "정말이요?"라고 물었고, 오면 정말 잘해주겠다는 꼬드김에 그 자리에서 미술교육과를 택했다. 여고 시절 클림트와 에곤 쉴레의 그림에 푹 빠져있기도 했고, 어릴 때부터 끄적이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 었으니까. 뭐 전혀 생뚱맞은 선택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나는 작은 결정에는 수십 번 고민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너무나 쉽게 해버리곤 한다.


다행히 나는 대학 생활에 차츰 적응했다. 예술에 대한 동경을 품었던 나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는 밝았지만, 혼자가 되면 어둠을 찾는 이중생활을 보냈다. 별 것 아닌 것도 뭐든 웃기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친구들 덕분에 나는 잘 웃고 떠드는 여대생으로 보였다. 사물이든 마음이든 밝은 빛 가까이 있으면 환해지는 법이니까. 하지만 혼자가 되면 나는 철저히 어두워졌다. 3학년부터는 기숙사가 아닌 자취방에 혼자 살게 된 뒤부터 유럽 예술 영화를 뒤지고, 인디밴드의 음악을 찾아 듣고, 음울한 소설을 읽었다. 온갖 감정이 밀려오면 싸이 월드 게시판에 글을 남기거나 일기를 썼다. 어둠이 편한 건 나의 백그라운드가 밝음 보다는 어둠에 가까웠기 때문이기도 했다.


온선영 동시「수리공 」에서는 달을 수리하는 수리공이 등장한다. 이 "수리공은/ 망치로 쿵쿵/ 달을 부수"며 나온 부스러기를 퍼내고 모서리를 대패로 미는 일을 한다. 보름간의 일을 마치자 "-깜깜하게 잘 고쳐졌군"이라는 말을 남기고 그는 깊은 잠에 빠진다. 그가 하는 작업이란 환한 보름달을 완성하는 것이 아닌, 달빛을 없애는 그믐의 상태로 만드는 것. 달이 차오르는 시간에 집중하는 보통의 동시와는 다른 길을 걷는 동시다. 이 동시에서 시절이 떠올랐던 건, 밝음 보단 어둠을 고치는 수리공의 모습과 그때의 내가 닮아서이다.


'lunatique'는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에 등장하는데, 변덕스러운 혹은 광기가 발작하는 것을 뜻하는 프랑스어다.

달의 영향으로 정신이상이 되는 상황, 다시 말하자면 달이 뜨면 몽환에 빠지는 상태라고 해야 하나. 소설을 읽은 다음부터 나의 아이디는 모두 lunatique. 그때의 나는 루나틱한 상태였다고 생각한다. 보름을 주기로 달이 차고 기우는 것처럼, 밝아지다가도 금세 다시 어둠을 찾는 시간이 주기적으로 오고 갔으니까.


다시 동시로 돌아가 본다. 꿈 밖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수리공은 잠에서 깨어난다. "와장창! 밤이 지금 깨지려고 해요"라는 다급한 목소리를 듣고 다시 망치를 드는 수리공이다. 15일이라는 보름이 지나면 밤을 환히 비추는 보름달이 "접시도 삼킬 만큼 커다랗게/ 쩌억, 입을 벌리"고 있기에, 다시 밝아진 밤하늘을 어둠으로 수리하는 수밖에! 그럼 나는 계속 어둠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수리공으로 여전히 살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 달처럼, 별처럼, 때론 환한 태양이 되어준 내 주변의 반짝이는 인연들은 나를 달을 부수는 수리공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혼자만의 어둠에 빠지지 않도록 자취방으로 줄기차게 불러대던 동기들이 스무살 나에겐 별빛이었다. 그후로도 내가 더는 캄캄한 어둠이 무섭지 않을 수 있도록, 나의 시간을 밝혀준 사람들을 만났다. 내 아픔까지 사랑할 거야.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진정 나의 어둠까지도 사랑해 주는 지금의 남편 또한.


나는 여전히 어둠과 친하지만 밝아지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어둠에 들어가려는 사람들에게 빛을 조금씩 나눠주려 노력 중이다. 물론, 너무 밝아진 내가 낯설 때면 어둠에 잠시 기대어 쉬어가기도 한다.


이제는 달이 기우면 기우는 대로, 달이 차면 차는 대로 달인 것처럼. 어두운 나도 밝은 나도 나이기에 나를 그대로 보려 한다. 망치를 들고 무엇을 수리할지는 수리공,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렸다는 걸 아는 것이 중년 아니겠는가.


* 소개된 동시가 실린 동시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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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된 동시를 볼 수 있는 곳

https://pf.kakao.com/_xjbBrxj/1004543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