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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요작가 Jun 18. 2021

삶과 죽음사이에서

<숨결이 바람될 때>


"반성하지 않는 삶이 살 가치가 없다면

제대로 살지 않은 삶은 뒤돌아볼 가치가 있을까?"


    삶과 죽음의 실체를 찾고 싶었던 폴은 인간의 정신을 가장 잘 설명한다고 믿는 문학을 거쳐 직접적인 경험을 하기위해 신경과 의사가 되기로 한다. 그는 의미를 이해하는 것과 의미를 만들어내는 경험 사이의 갈림길에 서곤했다. 김현 문학평론가는 '마주치거나 부딪치지 않고 이해되는 것은 없다'고 했다.


   난 의미의 이해와 경험 사이에 서 있구나! 독서를 하고 글을 쓰는 것은 본질에 다가가고 싶기 때문이다. 작가들의 지혜를 빌어 알아차리고 깨닫는 순간의 희열과 글을 쓰면서 나 자신을 발견하고 틀을 깨고 나오는 자유를 사랑한다.


   반면 경험은 현실이자 의미의 온전한 이해이다. 같은 상황이라도 우리는 선택에 따라 고유하고 독창적이며 세세한 경험을 만든다. 그 경험들이 제각각의 삶이다. 의미는 자유로의 물꼬를 터준다면 경험은 삶을 창조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나는 계속 나아갈거야

왜냐고? 난 그렇게 할 수 있으니까, 그게 바로 나니까"


   폴의 도덕적 사명감과 직업적 소명의식, 지적 탐닉을 접하며 숙연해졌다. 그 의지는 죽음의 그림자도 침범할 수 없었다. 암이 온 몸에 번지는 상황에서도 메스를 잡고자했던 그의 의지는 경이롭고 아름다웠다.


    그런데 책장을 넘기며 그의 철저한 소명의식은 점점 애처로움을 자아냈다. 나는 그를 보는게 아프고 슬퍼졌다. '그가 존재로서 삶을 영위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정체성이 육체를 반영하며 인간의 생물학적 의미를 찾고 싶어했던 그에게 육신의 한계는 단지 방해물에 지나지 않았던 것일까.


   일년동안 암을 의심하면서도 아내 루시의 걱정에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가자'는 그의 외면은 불안과 두려움이었다. 때로 육신의 고통보다 더 힘든 것은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다.



"삶과 죽음사이에 살면,

연민을 베풀고 존재를 고양시킬 수 있으리라."


  

  암 선고가 해방감으로 느껴진다는 그, 자신을 묶고 있는 멍에를 체감하는 그에게 연민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자신의 현실과 맞서지 않고 생과 사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혼란스러워졌다.


    적어도 죽음 앞에서만은 의사로서, 환자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스스로에게 마땅하다 여긴 것들을 내려놓고, 존재의 의미를 종용하기를 뜨겁게 응원했다. 루시가 그에게 가장 두렵고 무서운게 뭐냐는 질문에 당신과 헤어지는 것이라고 답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듣기를 바랐다.


   그는 남은 시간이 1년이라면 의사를 하기로, 한달이라면 책을 쓸거라고 했다. 그에게 시간은 과제와 책임의 마감시한이 아니었을까. 그는 암 선고 전까지 목표에 닿아있는 사다리의 모든 디딤대를 완벽하게 오르고 있었다. 그의 시간이 더이상 목표를 향하는 미래형이 아닌 과거완료형이 되어버렸을 때 그는 길을 잃었을 것이다.


  삶에 목적이 있다면 죽음에도 목적이 있지 않을까. 죽음의 의미는 무엇일까. 죽음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무엇일까. 순간순간 자신에게 충실한 것이 아닐까.


   그가 죽기 전 8개월에 딸 케이디가 태어난다. 그는 일생동안 한번도 느끼지 못한 충만한 기쁨, 만족과 휴식의 기적이라고 표현했다. 딸을 갖기로 한 그들의 결정이 사랑을 대변하는 것인지, 끝까지 가치로운 일을 하기 위함인지, 아내에 대한 폴의 미안함인지 감히 단언할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말한다. "고통을 피하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다." 케이티는 그가 그토록 얻고 싶어했던 삶과 죽음의 실체 너머 존재의 의미가 아닐까.


   우리가 끊임없이 지속되는 현재를 산다하더라도 우리는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삶이란 '지금 이순간'의 총합, 그 이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금 여기의 나를 저버리지 않는 한 삶은 반짝인다. 나에게 폴의 시련은 자신을 돌보고 하루하루 만족을 경험하고 육체의 한계에 매인 자신을 꽉 안아주라는 의미로 다가왔다. 죽어가는 대신 살아가기로 한 그의 선택이 쓸모를 하겠다는 다짐이 아닌 존재 자체로서의 자신을 살아낼 의지였을까. 폴에게 묻고 싶어진다. '폴, 당신은 스스로에게 연민을 베풀었나요?'   


   인생은 우리의 계획과 의지의 산물인 동시에 우연과 변칙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인생의 주어가 아닌 목적어가 될까? 폴의 말대로 인간은 절대 완벽할 수 없다. 있는 그대로 온전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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