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Jun 28. 2021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5

우월감과 열등감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은 우리가 당연히 가져야 할 권리이며, 우리를 인간답게 만들어 주는 정말로 중요한 필수요소이긴 하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매우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그것이 잘못되었을 때는 책임, 후회, 걱정, 자괴감, 억울함 순으로 이어지며 삶을 몹시 불행하게 만든다. 


첫 번째인 ‘과도한 책임감’은 멀쩡하게 잘 자란 많은 사람들을 망치는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한다. 그 나머지는 따로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삶을 좀먹는 최악의 감정들이다.


어떤 모임이든 리더의 위치에 있게 되면 감당해야 할 것이 바로 그것이다. 모임의 리더는 모임의 장소를 고를 권리는 있지만, 그 장소가 별로일 때는 회원들의 원망을 감당해야 한다. 잘되면 좋지만, 잘 되지 않을 때 듣게 되는 불만의 목소리는 당장 그 자리를 때려치우고 내려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할 정도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택하고 있다고 믿고 싶은 것일까? 그 이유를 제대로 알 수 있다면 선택을 하는 것에 대한, 사실상 집착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우리들의 깊은 곳에 숨겨진 본능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선택을 하고 있다고 믿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어떤 선택의 결과가 좋을 때 그저 좋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그것을 자신의 삶이 괜찮다는 증거나, 혹은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낫다는 증거로 삼고 싶어서 그렇다. 결국 내가 잘났다는 증거로 쓰고 싶어서 그렇다. 



사실 어떤 선택이든 이미 거의 결정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고 싶은 것이다. 사실 누가 그렇지 않겠는가? 부모로부터 좋은 머리나 외모를 타고났다고 해서 그것을 부모를 잘 만난 행운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다들 내가 잘나서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런 식으로 내가 선택한 것은 아니지만 우연히 타고난 모든 것은 내가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가 된다.


두 번째는 내가 과거에 무엇인가를 못했더라도 못한 것이 아니라 그 당시 다른 선택을 해서 안 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다들 학창 시절에 공부를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했다고 말한다. 마음만 먹었다면 공부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그땐 공부 대신 노는 것을 더 좋아서 놀았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이 ‘노는 것’을 선택했다고 믿고 싶은 것이다. 



그래야 지금 자신의 처지가 덜 비참해지기 때문에 그렇다. 만약 현재의 내 모습이 나의 타고난 모든 능력이 최대치로 발휘된 상태라면, 그런데 그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도대체 그 절망감과 자괴감을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을까? 그러니 우리는 과거에 우리가 얻지 못한 것들은 그저 당시엔 어리고 경험이 없어서 잘못 선택한 것이라고 믿고 싶어 한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이유는 정말로 타당한 일일까? 내가 뭔가를 잘하는 것은 정말로 내가 잘난 것이며, 내가 뭔가를 못한 것은 내가 못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안 한 것일까?


학창 시절에 자신이 얼마나 제대로 공부를 하고 있는지 알고 싶다면 시험을 봐야 한다. 물론 시험 보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지만, 아무튼 시험을 본 결과를 통해서 자신이 얼마나 나은지, 얼마나 부족한지를 판단해 볼 수 있다. 그리고 부족한 부분을 더욱더 집중해 공부해서 잘 채우면 된다. 현재 자신의 상태를 파악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결정하는 것, 그것이 시험을 보는 진짜 이유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삶도 그런 비슷한 과정이 필요하다. 사람들은 자신이 제대로 잘 살고 있는지가 불안하기 때문에 그것을 판단해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문제는 삶에 대한 평가는 학교와는 달리 그것을 판단해 줄 시험문제도, 채점자도 따로 없다는 점이다.


어떻게 해야 내 상태를 제대로 파악해 낼 수 있을까? 누군가가 만든 ‘인생에 있어서 반드시 해봐야 할 일’을 적어 놓은 위시 리스트를 보면서 해 본 일들을 하나씩 체크해 봐야 하는 것일까?


사실 이 문제는 딱히 고민할 필요가 없긴 하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이미 다들 그것을 본능적으로 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것은 바로 자신과 주변 사람들을 비교하는 일이다. 그 과정을 통해 자신이 얼마나 좋은 결과를 받고 있는지, 얼마나 행운이 찾아오는지, 어떤 부분이 부족한지, 어떤 부분은 꼭 가져야 할 것인지를 일상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한 번뿐인 인생, 다들 제대로 살고 있는지가 불안하니까 그렇게 타인과 나를 비교해서 내 상태를 점검하려는 것 자체는 그리 나쁘지 않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결코 그쯤에서 멈추지 않는다.


시험을 보는 원래 목적은 현재 내 상태 파악하는 것이지만, 정작 시험을 보는 모든 학생들은 전혀 그런 목적이 아니다. 학생들은 그 성적을 통해 자신의 잘남과 못남을 구분하는 용도로 쓰고 있다. 그리고 미래에 자신이 어떤 삶을 살아갈지 예측해보는 용도로 이용한다. 그래서 한 아이는 치킨을 튀기고, 또 다른 아이는 치킨을 배달하고, 나는 그들과 달리 치킨을 시켜먹는 사람이 된다. 그렇게 치킨을 기준으로 삶이 레벨화 된다.


이제는 시험의 진짜 목적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젠 모두 내가 몇 등이 되는지를 알고 싶어서 시험을 보고 있다.


삶을 바라보는 태도도 거의 유사하다. 만약 남과 자신을 비교했더라도 나은 점이 있다면 좋게 여기고, 부족한 점이 있다면 채우려고 노력하는 정도로 끝낸다면 좋지만, 그 누구도 그 정도로 끝내는 사람은 없다. 비교해서 나온 결과가 남보다 나을 때는 우월감으로, 부족할 때는 열등감으로 변질되고 만다.


외모가 좋거나 머리가 좋은, 타고난 행운에 의해 좋은 결과를 얻게 되면 그저 그 행복을 누리면 끝인데, 그것을 자신이 얼마나 잘난 사람인지를 증명하는 수단으로 쓴다. 반대로 타고난 재능이 그리 좋지 않아 나쁜 결과가 나오면 그냥 그것에 따른 불행만 감당하면 끝날 일이 내가 못난 사람이라는 자괴감을 불타오르게 만드는 불쏘시개 역할을 하고 만다.


더 큰 문제는 이런 현상이 점점 더 가속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SNS들은 원래는 주변에 아는 사람들만을 대상으로 할 수 있었던 자랑을 전 지구인을 상대로 할 수 있도록 해준다. 더해서 대다수의 상대적으로 잘나지 못하게 태어난 사람들은 이제는 전 지구에 있는 잘난 사람들의 자랑을 봐줘야 할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누군가의 잘남과 못남이 사실상 타고난 유전자와 자라난 환경에 의해서 거의 대부분 결정된다는 ‘과학적 증명’이 점점 더 많이 드러나는 상황에서, 역설적으로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보여주는 모습은 내가 잘난 것은 전적으로 내가 잘나게 태어난 것이란 믿음이 확산되고 있다.

작가의 이전글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4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