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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27. 2021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4

후회와 걱정

영화 쇼생크 탈출(The Shawshank Redemption, 프랭크 다라본트, 1994)에서 늙은 브룩스는 50년간 복역생활을 한 후 자유로운 세상 밖으로 나온다. 하지만 그는 역설적으로 모든 일을 강제로 정해주던 교도소의 삶과 달리 모든 것을 스스로 선택해야 하는 삶과, 아는 이 하나 없는 낯선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두려움으로 인해서 결국 ‘Brooks was here’라는 문구를 새기고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 이 문구는 나중에 가석방되어서 같은 방을 쓰게 된 레드를 통해서 ‘Brooks was here. So was Red’라는 문구로 확장된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은 저서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서, 자유는 좋은 것이지만 그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감당하기 힘든 고독과 견디기 힘든 책임감을 감수해야 한다고 표현했다. 이 표현이 꼭 옳다는 보장은 없지만, 자유가 가진 역설에 대한 아주 깊은 통찰이 숨겨져 있다고 볼 수 있다.


영화 속에서 등장하는 한 명의 인물과 현실 속에서 살았던 한 명의 철학자의 깊은 성찰을 통해서 우리는 선택이란 말이 가진 무게는 생각보다 몹시 무겁다는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딱히 복잡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다. 그저 모든 선택에는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책임이 가진 무게감을 충분히 알고 있는 상태에서 우리가 믿고 있었던 자유의지의 실체를 알고 나면 몹시 허무해질 수밖에 없다. 이미 태어남과 동시에 거의 모든 것이 결정되어서 사실상 선택을 할 수도 없는 우리는, 정말로 억울하게도 선택에 대한 책임을 온전히 져야 한 처지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문득 깨닫게 된다.


선택할 수 없는 부모 밑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현재의 내가 되었는데 공부를 잘 못하거나, 외모가 별 로거나, 노래를 잘 못하거나, 요리를 못한다고 해서 다른 잘하는 사람들과 끝없이 비교를 당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견디기 힘든 상처를 입고 끝없는 자기혐오까지 겪어야 한다. 


이 세상에 그 누가 그렇게 태어나고 싶어서 그렇게 태어났을까? 나도 잘생기고 예쁘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고,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은 사람으로 태어나고 싶었다. 하지만 단 한순간도 나에게 어떻게 태어나고 싶었는지를 물어보지 않고 그렇게 결정해 놓았다. 


태어나 보니 이미 이렇게 생겼고, 태어나 보니 이미 키가 작았다. 태어나 보니 미적분을 못했고, 태어나 보니 글씨체가 개발새발이었다. 태어나 보니 글 쓰는 것이 제일 어려웠고, 태어나 보니 몸치였다. 태어나 보니 맥주 한 잔에도 인사불성이 되었고, 태어나 보니 노래방에서 음정과 박자를 맞추는 것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웠다. 태어나 보니 농담만 하면 분위기가 썰렁해졌고, 태어나 보니 하고 싶은 말들은 싸우고 난 후 집에 와야만 생각이 났다.


내가 그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은 이 세상의 그 누구보다도 나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았지만, 어이없게도 지금의 내 모습은 온전히 나 홀로 감당해야 할 처지에 내몰렸다.


우리를 세상에 내 보내 준 부모님은 나를 갖기 전에 너 여자이고 싶니? 남자이고 싶니? 키가 크고 싶니? 머리가 좋고 싶니?라고 단 한 번도 묻지 않았다! 이런 과정이 어쩔 수 없는 우리의 운명이라고 해도 가끔 자괴감과 억울한 마음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나마 우리는 오늘 하루 무엇을 하고 보낼지 정도는 제한적으로 선택이 가능하다. 우주선을 타고 화성에 갔다 올지, 멋진 모델이 되어서 파리 패션쇼에는 참가할지는 선택할 수 없지만, 그래도 지금 근처 백화점에 나들이를 갈지, 영화를 보러 갈지, 점심으로 무엇을 먹을지, 더우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사 먹으러 커피가게에 갈지 정도는 그리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선택들 조차도 두 가지 위험을 품고 있다. 그 선택이 잘못되었을 때 경험하게 되는 후회와 걱정이다.



선택은 그 결과가 예상과 다를 때 ‘후회’를 해야 하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나들이 간 장소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때, 오랜만에 마음먹고 보러 간 영화가 재미없을 때, 맛집이라고 소문난 음식점에 갔지만 생각보다 음식이 맛이 없을 때, 땀을 흘리며 겨우 찾아간 커피 가게에 빈자리가 없을 때 생겨나는 후회라는 감정은 생각보다 우리를 많이 힘들게 한다.


앞에서 쌍둥이의 사례를 통해 살펴봤듯이 우리가 무엇을 선호하냐 여부가 거의 타고난 유전적 특징과 자라난 환경으로 결정되는 상황인데도 그렇다. 100년 후쯤에 부잣집에 태어나 우주선을 타고 화성에 가서 멋진 화성의 일몰을 보고 왔다면 안 생길 후회가 지금 이 순간 일 년간 돈을 모아 떠난 여행 중에 가방과 지갑을 모두 잃어버려 몹시 곤란한 상황에 놓이게 되어 생겨났다.


그나마 거기에서 멈추면 괜찮다. 하지만 후회는 거의 대부분 또 다른 감정을 불러낸다. 바로 걱정이다. 지금 선택하는 일이 잘못돼서 미래에 후회라는 감정을 또다시 겪어야 하는 상황을 예상하는 것, 그것이 바로 ‘걱정’이란 감정이다. 후회는 그나마 지나간 일이라서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체념을 할 수 있는 반면 걱정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이기에 체념하기도 힘들다.


이런 식으로 내가 무엇인가를 자유롭게 선택을 했다는 착각은 과거에 해온 일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할 일에 대한 걱정을 만들어 내고는 결국 끝없이 불안감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더군다나 거기가 끝도 아니다. 사실 그 정도로만 끝나도 후회나 걱정은 어느 정도 필요하기도 하다. 적당한 후회와 걱정은 어느 정도 긴장감을 만들어줘서 미래엔 좀 더 조심스럽게 생각하고 행동하도록 만들어 주기도 하니까 말이다. 


하지만 반복된 후회는 걱정은 불안감을 넘어서 이제는 감당해내기 조차 몹시 힘든 심각한 감정들을 만들고 내고 만다. 그것이 바로 “도대체 나는 왜 이럴까?” 하는 자괴감과 “도대체 너는 왜 그랬니?” 하는 억울함이다. 이런 감정들은 그나마 버텨내면서 살아가고 있던 우리들의 삶을 본격적으로 바닥으로 패대기치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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