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전찬우 Jun 25. 2021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3

노력을 하기 위한 노력

어떤 사람의 유전적 기질을 결정하는 것은 부모이다. 또한 후천적 성격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성장환경을 결정해주는 것도 거의 대부분 부모의 역할이다. 여기까지는 별 다른 문제도 없어 보이고, 오히려 자신을 사랑해주는 부모님의 보호 안에서 사랑받으며 자라는 것은 그 어떤 성장 조건보다도 중요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렇게나 중요한 부모의 존재는 역설적으로 뜻하지 않게 한 가지 중요한 진실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바로 그 누구도 자신의 부모를 선택하지 못한다는 점 때문에 생겨난다. 이것이 바로 선택의 자유가 가진 가장 큰 역설이다. 


이미 주어진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지만, 그 주어진 상황 자체가 이미 자기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이 결정되어 있는 것이다. 중국집에 들어가게 되면 짜장과 짬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지만, 이미 중국집에 들어간 상태는 이미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이미 중국집에 들어간 우리는 김치찌개를 먹고 싶어도 선택할 수 없다. 하지만 짜장과 짬뽕을 선택할 수 있기 때문에 스스로는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다.


물론 중국집에 가서도 억지로 김치찌개를 시켜서 먹을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는 있다. 그러니까 우리는 이미 주어진 환경이라도 스스로의 의지로 열심히 노력하면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과연 노력은 부모라는 태생적 한계점을 뛰어넘을 수 있게 만드는 유일한 희망이 될 수 있을까?


개인적으로는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노력에 관해 우리가 지금껏 간과해온 점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는 왜 노력을 하게 되는가에 대한 질문이다. 도대체 어떤 차이로 인해서 누군가는 미친 듯이 노력을 하고, 누군가는 전혀 노력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일까?


어떤 종류이든 간에 상관없이 ‘노력’은 기본적으로 힘든 과정이다. 그럼에도 미래를 위해서 하게 된다. 힘들게 공부하고, 힘들게 근력 운동을 한다. 힘들게 기술을 연마하고, 힘들게 정보를 찾아다닌다. 그런데 당연하게도 힘들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불행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결국 노력은 자신을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아주 이상한 행동이다.


언제나 행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가진 인간이 도대체 왜 스스로 불행하게 만드는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가장 첫 번째 답은,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면 더 불행해지니까 그렇다. 그러니 누군가 열심히 노력한다면, 그 안엔 미래에 닥칠 불행에 대한 커다란 두려움이 원동력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 두려움이 바로 의지와 노력의 진정한 본질이다.


그렇다면 왜 똑같이 닥칠 미래에 대해서 누군가는 더 큰 두려움을 느끼고 다른 누군가는 덜 두려움을 느끼게 되는 것일까?


여기에서 ‘지적 능력’, 그러니까 지능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능은 여러 가지 용도로 쓰이지만, 미래를 예측해내는 능력으로 아주 중요하게 쓰인다. 그래서 머리가 좋을수록 조금 더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고, 지금 현재에 미래에 닥칠 불행을 막을 해결책을 찾아내도록 만든다.


이것이 의도이며, 의지이며, 노력이다.



물론 노력을 하는 이유는 추가적으로 더 있다. 열심히 노력하다가 보면 성과가 나타나고, 성과가 나타나면 만족이라는 보상도 따른다. 여기엔 타고난 다양한 재능이 아주 크게 작용한다. 더해서 주변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이 이어진다. 그렇다면 오히려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노력을 할 수 있고, 노력을 해서 만족할 만한 성과가 나오는 사람이 노력을 하지 않으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착각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이 노력해서 성공하는 것이 아니라, 머리가 좋으면 노력을 할 수밖에 없으며, 그래서 대부분 성공하게 된다.


결국 노력하지 않는 사람은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다. 하나는 미래를 예측해내는 능력이 부족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노력을 해도 제대로 된 성과를 얻어 낼 수 없어서 그렇다.


자, 그럼 이제 슬프지만 인정하자. 노력은 선천적으로 타고 난 유전자와 환경이 가진 유리함을 극복해낼 수 있는 유일한 무기로 칭송받지만, 실제로는 노력을 할 수 있는 힘 자체가 '지적 능력'에 의해 생겨나며, 그 지적 능력은 온전히 부모로부터 받은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노력하는 능력 역시 다른 모든 능력들과 마찬가지로 선천적으로 타고 난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기정사실화 되면 사회적으로 커다란 혼란이 생긴다. 한 사람의 경쟁력이 오직 유전적 특징과 자라난 환경에 의해 거의 대부분 결정되어 버린다면, 타고나지 못한 많은 사람들의 불만과 절망은 도대체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 것일까? 이것은 이후 인간사회의 매우 커다란 갈등 요소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것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함을 피하고 싶은 사회는 아주 영악하게 군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회는 결국 또 머리가 좋아 사회 지도층으로 올라서 사회적 가치를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의도적으로 노력은 타고나는 재능이 아니라 네가 노력하면 얻을 수 있는 의지라고 설명한다. 또한 자신의 성공 역시도 타고난 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힘들게 노력해서 얻어 낸 것이라고 강조한다.


나의 성공은 나의 강한 의지와 노력의 산물이며, 너의 실패는 너의 게으름과 부족한 노력의 결과라는, 누군가의 성공과 실패가 오직 개인의 노력 여부에 달렸다는, 만능의 불평등 해결 논리로 활용된다. 이것은 진정한 신의 한 수라고 밖에 할 수 없다. 


노력하는 재능이 타고난 것이 아니게 되는 순간, 타고난 자들은 자신의 잘남을 타고나지 못한 자들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근거가 되며, 타고나지 못한 자들의 불만은 타고난 자들에 향하는 것이 아니라 모두 본인의 잘못으로 여기는 자책감으로 수렴되고 만다.


이것은 마치 부잣집 아들이 부자 아빠를 선택했다고 말하는 모습과 같지만, 사람들 눈에는 그들이 강조한 '힘들게' 노력했다는 사실만 보이고 그들이 이미 가지고 태어난 능력과 그런 노력을 할 수 있게 만든 타고난 지적 능력은 보이지 않는다. 그렇게 해서 결국  같은 편이었던 노력은 떠밀려서 선천적으로 타고나는 재능의 반대편에 서고 만다. 그리고 지금은 누구나 다 그렇게 믿고 있다.


뭐, 괜찮다. 어떤 의도이든 상관없이 사회적 혼란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


그런데 노력에 관해 숨겨진 치밀한 음모는 이후 의도치 않은 커다란 부작용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그것이 바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라는 환상이다. 그래서 대부분이 사람들은 자신이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것은 이미 타고난 것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의지에 의해 결정될 수 있다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 상황이다. 열심히 노력하면 선택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다.


이런 착각이 당장은 큰 문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은 늘 좋은 것만이 아니다. 선택은 우리를 불행에 빠뜨리는 주범 중 하나이다.



작가의 이전글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