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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24. 2021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2

내가 결정되는 과정

미국 미네소타 대학교 심리학 교수인 토마스 부샤드(Thomas Bouchard Jr)는 우연한 기회에, 1979년 태어나자마자 각자 다른 가정에 입양된 여아 쌍둥이가 40년 만에 만났다는 기사를 읽고는 큰 흥미를 느꼈다. 그래서 두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를 시작했는데 그 후 세상이 깜짝 놀란 만한 연구 결과를 발표했다. 태어난 후 자라나는 동안 단 한 번도 서로 만난 적이 없었던 두 사람이 습관적으로 손톱을 깨물거나, 여자치고는 드물게 취미로 목공을 하고 있거나, 농구를 싫어하는 등, 꽤 많은 공통된 특징을 보여줬던 것이다.


이 연구는 이후 좀 더 많은 쌍둥이들을 대상으로 심화되었는데 연구를 거듭할수록 그 결과는 첫 번째 연구결과의 타당성을 높여 주었다. 


쉽게 말해서 누군가가 매우 활달하고 남들 앞에 서는 것을 좋아한다면 그것은 이미 유전적으로 어느 정도 결정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 서로 다른 환경에서 자랐더라도 동일한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성격적 유사한 점이 나타나는 것이다. 흔히 이런 타고난 개인적 특성을 보통 '기질'이라고 칭한다.


이 연구결과는 어떤 한 사람의 고유한 특징이 성장 환경만큼이나 유전자적 요소가 큰 영향을 끼치고 있음을 의미한다. 지금은 아니지만, 과거 한 사람의 고유한 특징의 대부분이 환경적 영향에 의해서 결정된다고 믿고 있었던 그 당시 사회에는 나름대로 충격적인 결과였다. 


아이가 삐뚤어는 것은 무조건 부모의 문제이며, 반대로 아이가 반듯하게 크는 것 또한 부모의 능력이라는, 그동안 사회에 자연스럽게 통용되던 상식에 오류가 있음을 객관적 증거들을 통해서 지적한 것이다.


이 연구는 기본적으로 어떤 한 사람의 특징이 결정되는 과정에 있어 ‘유전자적 특징’과 ‘자라난 환경 조합’ 중에서 어떤 요소가 더 우세한가에 대한 논란을 다루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둘 중 누가 더 우선적으로 작용하게 될까를 그저 제삼자의 관점에서 흥미롭게 바라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논란은 그 내용 자체보다 훨씬 더 무서운 진실 하나를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숨겨진 진실은 편안하게 제삼자의 자리에서 지켜보고 있던 우리의 멱살을 잡고 강제로 끌고 와 그 논란의 중심에 서게 만들고 만다.


그것은 바로 쌍둥이의 사례처럼 유전과 환경 중 어떤 요소가 한 사람을 결정하는 데 있어서 더 큰 영향을 끼치는지 자체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결국 한 사람의 고유한 특징은 타고난 유전과 자라난 환경에 의해서 거의 대부분이 결정되고 있다는, 조금만 생각해봐도 정말로 무서운 진실이다.


도대체 그게 뭐가 문제냐고 되묻고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럼 잠시 한번 생각해 보자.


정말로 유전과 환경이 나의 고유한 특징을 결정하는 요소라고 한다면, 내 유전적 정보나 자라난 환경을 전혀 스스로 만들어내지 못한 나는, 현재의 고유한 특징을 가진 내가 결정된 것에 도대체 어떤 영향을 끼칠 수 있었을까? 현재의 내가 나인 이유에 내 의도나 의지에 의한 선택된 것들이 단 하나라도 존재할 수 있었을까?


없다. 거기엔 내 영향은 단 하나도 없다.


지금의 나에게 나만의 고유한 개성이 생겨난 이유는, 그저 지금의 부모로부터 태어났고 그 부모가 마련해준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이다. 거기엔 내 의지로 선택한 것이나 결정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 스스로 현재의 내가 된 것이 아니라,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후 내가 어떤 특징을 가진 존재임을 그저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연구결과는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기질은 DNA적 특정 돌연변이 부분만 빼고 거의 대부분이 부모로부터 결정되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후 부모가 마련해준 환경에 의해서 변화되었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들이 나온다. 지금 내가 배가 출출해서 야식으로 라면에 김치를 먹기로 선택을 했을 때 과연 그것이 정말로 “선택”을 한 것인가?


한국에서, 한국인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지 않았어도 여전히 김치를 먹고 싶어 할 것인가? 발바닥을 만진 후 반드시 코로 가져가 그 냄새를 맡는 누군가의 더러운 버릇 역시도 “선택”한 것인가? 물론 옆에서 더럽다고 기겁을 하는 사람이 휘두른 손에 자신의 등짝을 내줘야 하긴 하지만 말이다. 공부를 하는 것이 너무 재미가 있어서 시간만 나면 공부를 하는 사람은 과연 공부를 좋아하는 것을 “선택”한 것인가? 축구나 농구와 같은 스포츠를 좋아하는 것도 비슷하다. 타고난 몸치가 운동을 좋아하긴 쉽지 않다.


그렇다면 '선택의 자유'라는 개념은 정말로 실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우리의 상상 속 착각일까?


물론 어린 시절엔 먹지 못했던 생선 내장탕을 나이를 먹고 노력해서 먹을 수 있었으니 선택을 위한 자유의지가 아예 없다고 단정하긴 힘들다는 반론을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신이 미국에서 미국인으로 태어나서 평생 미국에서 살다가 죽었다면 살아있는 동안 생선 내장탕을 먹을 노력 자체를 할 수 있었을까? 그럴 경우엔 생선 내장탕이란 음식이 있는지도 모른 채 살다가 죽을 가능성이 오히려 훨씬 크다. 


살아가고 있는 환경에서 생선 내장탕이란 음식이 있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런 변화가 일어난 것이다. 더군다나 처음부터 먹기 싫은 생선 내장탕을 먹으려고 왜 노력했겠는가? 그것 자체가 바로 그 사람의 환경이 – 주로 회사 같은 곳 - 반드시 생선 내장탕을 먹어야만 적응할 수 있는 상황이었기에 그랬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례들은 내가 현재 무엇인가를 자유의지로 결정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기엔 부족하다.


그렇다면 나는 매일 도대체 무엇을 '선택'하고 있을까? 내가 선택하고 있다고 믿는 것들이 가진 진짜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어쩌면 우리는 이미 결정된 것들을 수행하는 매우 복잡한 체계를 가진 로봇에 불과한 것일까?


혼란스럽지만, 정말로 기분이 나쁠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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