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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찬우 Jun 29. 2021

단지 예쁘다는 이유로 사도 된다 #6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

아무리 세계적인 발견을 했더라도 우연히 알게 되었다면 사람들의 칭송이 좋긴 해도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겸손해지게 된다. 결국 ‘우연히’ 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똑같은 일을 ‘내 의도’에 의한 선택으로 해냈다면 그것은 당연히 자신의 자랑스러운 성과가 되어서 겸손을 떨게 된다.


그 의도를 이뤄낼 수 있게 해 준 특정한 ‘유전’과 ‘환경’을 누릴 수 있었던 부모로부터 태어난 우연은 모두 간과되고, 더해서 또 다른 타고난 능력인 ‘노력할 수 있는 성향’은 자신의 의지로 화려하게 장식이 된 채, 자신이 이뤄낸 성과는 모두 자신의 삶에 대한 자랑스러움으로 환산된다.


착각이긴 해도 행복하니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그 반대편 쪽이 너무 뼈아프다. 잘나게 태어나 멋진 성과를 냈다면 자랑스럽게 살아갈 수 있지만, 운 나쁘게 못나게 태어났다면 그 못남으로 인해 생겨난 모든 결과를 스스로 모두 다 감당해야 한다. 단지 타고난 운이 나쁜 것인데 그것이 자괴감이 되고 만다. 운이 좋았을 때 그것을 우월감으로 갖고 싶어서 운이 나쁠 때 느끼게 될 자괴감을 평생 감당하고 살아가야 한다.


행운이 찾아오면 내 능력으로 여기고 잘난 채 하다가 불운이 찾아오면 자기 실망감과 억울함으로 인해서 견디질 못한다. 모든 것을 선택했다고 믿고, 그 선택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을 평가하는데 이용한다.


물론 선택을 하긴 했다. 하지만 그 선택은 그 당시의 ‘나’라면 당연히 해야 할 선택이었다. 다른 선택은 하라고 해도 할 수 없었던 선택이다. 단지 그것을 미래에 시점에서 보니 문제가 있어 보이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늘 미래 시점에서 과거를 보면서 자신의 선택을 바라본다. 그리고 자신의 예상과 달리 잘못되었을 때 감당하기 힘든 자괴감을 견뎌내야 한다.


고속도로를 타고 어딘가를 갈 때 갑자기 예상치 못한 사고가 나서 길이 막혀도 자신의 선택에 대해서 화가 난다. 어쩔 수 없이 사고를 낸 사람들을 비난한다. 물론 다른 길을 선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길을 선택하는 순간만큼은 그것이 최선이었다. 



영화를 선택할 때, 음식점을 선택할 때, 좀 더 길게 보면 직장이나 배우자를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다. 어디로 갈게 될지 모르는 결과를 가지고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무능력함과 어리석음을 비난하는 용도로 쓴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반응일까? 아니다. 우리는 그 누구도 그런 비난을 들을 만큼 잘못하고 있지도 않다. 그저 운이 나빴던 것이다.


누군가 어느 지역 땅을 사면 큰돈을 벌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땅을 샀을 때 그 땅값이 오르지 않고 떨어지면 후회도 하지만 그런 욕심을 부린 어리석음과 그 땅에 대한 정보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자신에 대한 자괴감이 든다.


남편이 자신의 생각과 다른 사람일 때도 후회와 원망이 동시에 생겨난다. 그래서 무척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왜 결혼 전에 남편의 문제를 파악하지 못했는지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 된다. 과거의 자신을 보면 도시락 싸서 말리고 다니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남편도 마찬가지 입장이다. 결혼 후 보여주는 아내의 모습은 자신이 상상하던 모습과 전혀 다르게 되면 아내에게 끌렸던 과거 자신의 어리석음을 자책하지 않을 수가 없다. 만약 과거로 되돌아갈 수만 있다면 멱살을 잡아서라도 말리고 싶다.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 과거 학교 다닐 때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걸이라는 후회를 하기도 한다. 만약 지금 상태로 과거로 돌아가면 그때보다 훨씬 더 잘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다 겪었기에 아마도 엄청 열심히 공부를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상태가 아닌 과거와 똑같은 경험과 지식을 가진 상태에서 또다시 그 시기를 보낸다면 뭔가가 바뀔까? 아니다. 단 하나도 바뀔 것이 없다. 우리가 아무리 과거로 되돌아갈 수 있더라도 같은 상황에 현재의 자신이 아닌 과거의 자신이라면 결국 같은 선택을 할 수밖에 없다.


똑같이 땅을 사고, 똑같이 남편이나 아내를 선택하고, 똑같이 공부를 안 할 것이다. 지금의 나에겐 한 없이 어리석어 보였던 그런 선택들이라도 그 당시에 나에게는 그것이 최선의 선택이었다. 


당시의 우리는 모두 그런 선택들이 최선이라고 믿은 잘못밖에 없다. 그 남자나 그 여자를 보고 한눈에 반했든, 수학 수업시간마다 졸았든 상관없이 당시의 우리에겐 그것이 최선이었다. 


이 세상에서 내가 가장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은 누굴까?


나다. 바로 내가 나의 행복을 가장 원한다. 그러니 과거에 우리가 한 모든 선택은, 그리고 오늘부터 하게 될 모든 선택은 언제나 최선의 선택이다. 내가 행복하기를 가장 바라는 내가 내린 선택이니까. 단지 그것을 모든 것이 결정된 후의 미래의 시점에 바라보니 도대체 왜 그랬니,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결과도 안 좋아서 기분이 별로인데, 자신을 비난까지 하고 있다. 암에 걸렸는데, 암에 걸린 자신의 과거 식습관을 비난하고 있다. 이제 제발 그러지 말자. 이미 암에 걸려서 충분히 힘들다. 더 힘들게 하지는 말자. 매일 자신이 하고 사는 일에 대해서도 괜한 의문을 갖거나 후회를 할 필요가 없다. 그런 것들은 이미 그렇게 되도록 결정되어 있다.


그럼 “정말로 그렇다면 내 의지나 노력 여부와 상관없이 이미 모두 다 결정되어 있는 세상이니 아무렇게나 살아도 되나요?”라고 따질 만도 하다.


하지만 이 질문은 처음부터 완전히 잘못된 이해로 인해 일어난 착각이다. 잘 생각해 보자. 그 질문은 조금만 다르게 바꾸면 “이미 결정되어 있는 세상이니 최대한 열심히 살아가도 되나요?” 가 된다. 


언뜻 보면 두 질문은 서로 반대 같지만 온전히 동일하다. 아무렇게나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없듯이 열심히 살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다. 아무렇게나 살아서 불행한 삶과 열심히 살아서 행복한 삶 중에서 선택 할 수 있다면 당신은 과연 무엇을 선택하고 싶은가? 당연히 열심히 살고 행복한 삶을 원할 것이다. 단지 열심히 사는 것이 좀 힘든 것뿐이다.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걱정을 조금만 거두고 나면 비로소 현재가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나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과거도 미래도 아닌 지금의 '현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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